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우리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이유 (야고보서 1:13~18)

새벽지기1 2022. 2. 20. 07:49

“아버지를 의지하고, 동행하고, 가까운 자녀가 될 때

수많은 유혹에 속지 않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이 늑대를 어떻게 잡는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은 날카로운 칼끝에 피를 흠뻑 묻힌 다음 그것을 얼립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위를 향하도록 얼어붙은 땅속에 파묻어 놓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와서 칼날을 핥기 시작합니다. 늑대의 혓바닥이 얼어서 무감각해지고 어느새 날카로운 칼끝을 핥게 됩니다. 늑대는 자신의 피까지 흘리게 되는데 그 피에 끌려서 더 빠른 속도로 칼날을 핥다가 죽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 도축장에서 소를 잘 죽이는 법에 대한 글도 본 적이 있습니다. 낯선 환경에 처하게 되면 소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요동 할 수 있어서 최대한 안정시키기 위해서 만족스럽고 평안한 환경을 만든다고 합니다. 소들을 트럭에서 내릴 때 소들이 지나는 통로에 소들이 비벼댔던 촉감과 비슷한 장치를 마련하고 집에 가는듯한 느낌을 경험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소들이 자신의 발굽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도살된다고합니다. ‘삶은 개구리 증후군’ 이라는 말을 들어보 셨을 것입니다. 냄비 속에 개구리를 넣고 0.2 도 이하로 서서히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는 죽음에 이르는 온도에 이를 때까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갑자기 물의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가 뛰쳐나가지만, 서서히 온도를 올리면 그곳을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인간이 다른 생물을 어떻게 속이고, 목적을 이루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이 유혹 때문에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지도 보여줍니다. 죽음에 이르는 유혹은 돌발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속이고 속는 과정이 있습니다. 늑대와 소와 개구리가 인간의 속임수에 넘어가듯이 인간도 속고, 서서히 유혹에 빠져듭니다.

 

오늘 말씀에서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속지 마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유혹에는 반드시 속임수가 있습니다. 유혹의 위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사소해 보이고, 무시해도 좋을 만한 유혹으로 시작해서 심각한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유혹에 무너진 사람들을 보면 평범한 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동행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린 이후 유혹이 왔다면 이겨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윗을 대적할 수 없는 것 같은 편안한 환경에서 작은 유혹이 시작됐습니다. 견고한 성이라도 배신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머지않아 무너지는 것처럼, 스스로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단 하나의 배신의 씨앗만 있으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가면 극단적으로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습니다.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사탄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이후 하나님이 책임을 추궁하셨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서 아담이 “하나님께서 함께하라고 제게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제게 주어서 먹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전가했습니다. 여자는 어땠습니까?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먹었습니다”(창 3:13)라며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험에 빠질 때 끊임없이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1장 1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으로 시험하지 않는 분입니다. “누구든지 시험을 당할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고 있다’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13절). 이때 ‘시험’ 은 12절까지 나타난 연단으로 서의 시험 ‘ 트라이얼(trial)’ 혹은 ‘ 테스트(tes t)’가 아닙니다. ‘ 템프테이션(temptation)’ , 유혹으로써의 시험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유혹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무너뜨리려고 유혹하시지 않습니다. 유혹의 원천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을 이용하거나 악에 의하여 유혹당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유혹의 원천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탄입니다.

 

죄와 유혹의 단계

 

“각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해 죄를 낳고 죄가 자라 사망을 낳습니다”(14~15절). 여기서 ‘각 사람’은 누구에게나 해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욕심’ 이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갈망을 뜻합니다. 이 말씀 속에 죄와 유혹의 ‘라이프 사이클’ (Life Cycle)이 나타납니다.

첫째, 미혹의 단계입니다.

‘ 미혹’ 이라는 단어는 낚싯바늘에 있는 미끼를 물고기가 물은 상태를 뜻하는 단어로 설명되는데, 내면의 욕심이 외부 유혹을 만나는 것이 미혹된 상태입니다. 내면에 있는 갈망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갈망하도록 지으셨 고, 갈망을 통해서 우리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배고픔의 갈망, 성적인 갈망, 세상을 다스리는 갈망을 통해서 세상이 움직이도록 만드셨고, 반성하도록 만드셨고, 생명을 유지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유혹 거리와 미혹 거리를 우리가 물게 될 때 미혹의 상태에 빠져듭니다.

 

둘째, 잉태의 단계입니다.

욕심이 유혹과 결합해서 죄를 낳는 것입니다. 미혹의 단계에서 잉태 단계로, 잉태의 단계에서 성장의 단계를 거쳐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질 때 미혹의 단계, 잉태의 단계, 죄가 자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죄가 나타나는 것은 절대로 우발적이거나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의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속아서 참여하기도 하고, 알고도 참여합니다. 아는 것에는 분명히 속임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와 유혹에는 절대로 진실이 없습니다. 반드시 거짓이 있습니다. 진실인 줄 알았는데 거짓입니다. 자신의 감정에도 속습니다. 그래야만 될 것 같은데 그것도 속는 것입니다. 사탄은 거짓을 이용해서 미혹하고, 죄를 낳게 하고, 사망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끌고 갑니다. 갈망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갈망의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향하지 않고 사탄이 주는 미혹거리로 향하게 되면 미혹의 단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와 유혹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의 갈망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욕구를 제어하는 것도 욕구가 필요합니다. 방향이 잘못된 것이지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 다. 욕구가 무엇을 붙잡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붙잡는지 아니면 사탄이 준 미끼를 붙잡는지가 중요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선택이 있기에 죄와 유혹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정체성 형성의 중요성 하나님은 왜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유혹 거리를 없애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선택하고 성장하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성장이 진정한 성장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스스로 실패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으면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패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이고, 반역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만드셨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포로가 되었지만, 유혹을 물리치고 이기는 힘과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게 올바른 정체성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유혹 거리에 속아 미혹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고,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정체성이 올바로 세워져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미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최초의 타락에서 왜 여인이 뱀에게 미혹됐습니까?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서 정체성의 가장 큰 혼란을 경험한 사람이 에서입니다. 그가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기고, 아버지의 축복을 뺏기고, 사냥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그렇게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이 되었을까요?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공급자이고, 보호자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에게 “나를 위하여 사냥해서 고기를 가져오라. 그럼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것 때문에 에서의 정체성의 확립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은 유혹입니다. 사단으로부터 받은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셨을까요? 그 직전에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 할 때 그 시험의 본질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보호자가 되고, 스스로 돌보고, 스스로 영광을 취하는 존재가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는 음성으로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의지해서 세 번의 유혹을 이겼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유혹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옛사 람이 처리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버지는 존재의 근원이며, 공급자며, 보호자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이 유혹을 이기는 능력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잘못된 행실을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더 큰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혹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오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분에게는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17절). 예수님이 받으신 모든 유혹의 뿌리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버리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 이십니다. 우리에게 온갖 좋은 선물을 주시고,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유혹이 강하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이유는 궁극적인 대상이 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 잘 믿을수록 유혹이 강하고 집요하게 옵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왜 유혹에 빠집니까?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쓰러지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타격을 입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유혹을 받은 적이 없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완전히 닮았던지, 세상과 하나 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진짜 거룩하게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유혹에 부딪힙니다. 자녀들을 무너뜨림으로 아버지를 공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자녀들을 아버지로부터 끊어내고, 아버지의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녀들을 유혹합니다. 불순종의 자녀를 통해서 공격합니다. 이미 사탄의 편이 된 불순종 자녀들을 통해서 공격합니다. 사탄은 전능하지 않습니다. 불순종하는 이들만 협조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은 절대로 사탄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입니다. 빛의 근원이십니다. 빛의 창조자이시고, 완전한 빛입니다. 태양도 발광체입니다. 태양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온전한 빛이 아닙니다. 빛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통로일 뿐입니다. 태양 빛으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지 않습니까? 그 빛을 통해 식물이 자라고,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이 형성됩니다. 우리가 빛을 많이 쐴수록 건강해지는 이유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빛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도 빛이 우리에게 주는 공급이 얼마나 큽니까?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밝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그분 앞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빛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빛의 자녀로 변화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빛의 아버지가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것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그분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 다”(18절). 이 땅 가운데 빛을 통해서 수많은 좋은 것들을 공급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재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를 통해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자연 만물은 우리를 따라 새 창조의 영역에 구속받는데, 인간이 먼저 구속받고 만물이 구속됩니다. 첫 번째 창조에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새 창조에서는 인간을 먼저 창조하시고 만물을 구속하는 방법으로 재창조하십니다. 유혹에 빠지는 이들과 대조되는 일을 하게 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죄와 사망을 낳지만, 우리 아버지는 진리의 말씀으로 새 생명을 낳습니다. 사람은 욕심으로 죄와 사망을 낳지만,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새 생명을 낳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따라 살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유혹의 핵심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빛의 아버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고, 재창조를 이루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입니다. 미혹의 단계, 죄의 잉태 단계, 죄가 자라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벗어나지 못하게 함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혹의 목적입니다. 유혹에 넘어가 죄의 습성에 빠져 있는 영혼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신호가 무엇일까요? 기도하지 않는 삶입니다. 복음으로 우리가 재창조될 때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갈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갈망이 심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임재, 아버지의 도우심, 아버지의 보호하심을 의지하 는 갈망이 우리 안에 일어났고, 아버지는 그 갈망에 응답해서 온갖 좋은 선물과 완전한 은사, 새 생명을 낳는 역사를 계 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 니다. 빛들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온갖 좋은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 유혹 거리로 채우려고 할 때 삶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아버지가 주시는 좋은 선물을 받고 체험 하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그것이 유혹을 이기는 길입니다. 아버지를 의지하고, 아버지와 동행하고, 아버지와 가까운 자녀가 될 때 우리를 무너뜨리고 아버지의 나라를 공격하려는 수많은 유혹에 속지 않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