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거꾸로 보는 인생의 지혜 (전도서 7:1~4)

새벽지기1 2022. 1. 29. 07:34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습니다.

인생의 시작보다 마지막이 낫습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다.”

 

아들에게 부유함을 자랑하고 싶었던 아빠가 있었습니다.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지를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거대한 저택에서 나와 가난한 친구가 사는 작은 시골 농장으로 갔습니다. 작고 허름한 집에서 함께 이틀 밤을 보냈습니다. 아빠는 아들이 가난한 집을 경험하고 자신이 의도한 것을 깨달았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아들아,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보았니? 너는 거기서 무엇을 배웠니?”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네 아빠 정말 좋았어요. 우리 집에는 개가 한 마리뿐인데 그 집에는 네 마리나 있었어요. 우리 집 뒷마당에는 수영장이 한 개밖에 없는데 그 집 뒤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개울이 있었어요. 우리 집에는 전등만 있는데, 그 집에는 멋진 별들이 있었어요. 우리는 밤에 제 각각 자기 방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들은 모두 둘러앉아 친구처럼 재미있게 놀았어요. 아빠 정말 감사해요.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들의 순수한 눈에는 세상을 거꾸로 보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덧없는 세상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그러나 헛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지혜를 고백합니다. 특히 7장은 사람들이 대부분 별생각 없이 옳고 좋다고 생각하는 상식의 평형을 깨뜨립니다. 7장에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이 무엇보다 낫다’ 입니다. 인생을 거꾸로 볼 수 있도록 세상 사람들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뒤집으면서 인생의 지혜를 알려 줍니다. 인생을 거꾸로 보면서 얻은 지혜입니다.

 

선한 평가가 풍요보다 낫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모든 사람은 죽게 돼 있으니 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2절).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4 절). 세상 상식으로는 잔칫집과 초상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잔칫집이 좋습니다. 친족이나 갈 수밖에 없는 초상집이 아니고서 전혀 모르는 두 가정의 잔칫집과 초상집이라면 당연히 잔칫집으로 마음이 쏠립니다. 잔칫 집은 분위기가 밝고 기쁘고 즐겁지만, 초상집은 우울하고 슬프고 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그 초상 집에서 지혜를 얻습니다. 이 말씀은 잔치의 즐거움이나 기쁨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잔치의 기쁨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결혼 잔치에 참석하셨고, 포도주가 부족할 때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서 잔치의 기쁨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잔칫집의 기쁨에서는 초상집에서 얻는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초상집에서 얻는 지혜 때문에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고백합니다.

 

세 가지 지혜가 나타납니다.

첫째, 이름에 대한 선한 평가가 삶의 풍요보 다 낫습니다.

1절 전반부를 보면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좋은 향수’ 라고 했는데 향수보다 기름이 더 정확합니다. 이름은 히브리어로 ‘쉠’ 이고, 기름은 히브리어로 ‘쉐멘’ 입니다. 이름은 출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가족들이 태어난 아기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까? 이름을 지을 때 대부분 그 아이의 인생이 정말 행복한 인생, 유익한 인생, 쓰임 받는 인생이 되라고 붙여줍니다. 출생 때 부여된 이름이 죽음 앞에서도, 죽음 이후에도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명예롭게 남는 것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좋은 기름’이란 죽음과 관련 있습니다. 당시에는 시체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부음으로써 부패를 방지하고 정결케 했습니다. 이 세상의 부유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시체에 최고급 향유를 부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당시 부의 척도였기 때문입니다. 풍요로운 삶을 상징하는 좋은 기름보다 그 이름이 아름답고 선하고 존귀하게 기억되는 삶이 더 낫습니다. 그것이 초상집에서 얻는 지혜입니다. 시신에 값비싼 향유를 부으면 뭐합니까? 관이 값비싸면 뭐합니까? 그 사람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한다면, 그 이름이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6장에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낭비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이 향유로 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도 함께 전파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향유를 다 부었습니다. 그 좋은 기름을 다 썼습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기름을 부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참된 지혜는 죽음 너머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이름만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름이 초상집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잔칫집에 서는 얻을 수 없는 지혜입니다.

 

인생의 시작보다 마지막이 낫다

 

둘째, 인생의 시작보다 마지막이 낫습니다.

1절 후반부를 보시면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출생이 죽음보다 낫습니다. 생명이 죽음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이 우리 생의 끝이 아니므로 진정한 지혜는 죽음 너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청교도 윌리엄 로어는 “매일 잠을 자는 침대가 자신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하고, 어떤 이야기를 할 지를 상상해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낫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시작보다 낫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인생을 바로 셀 수 있도록 가르치소서. 그래야 우리가 마음에 지혜를 담게 될 것입니다”(시 90:12). 인생의 마지막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낫다고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늘 과거를 동경하고, 젊음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늙어감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마지막을 향해서 가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마지막이 아니 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이 시작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시므온’ 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그에게 “네가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보기 전까지는 너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는 날마다 메시아의 출생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 왔습니다. 성전의 뜰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늘 기도하던 시므온이 성령의 계시를 받아 성전 뜰로 나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아이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다스리시는 주여, 이제 주께서는 주의 종이 평안히 가게 해 주십니다”(눅 2:29).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고 축복하는 소명을 마치기 전까지 죽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영혼들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기 전까지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병들어도 낫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이 이루시는 소명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이 죽음 앞에 섰을 때도 “주의 종이 평안히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죽음 앞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날 때와 죽을 때가 정반대여야 합니다. 태어날 때 울고, 죽을 때는 기쁨과 평안 가운데 가야 합니다. 시므온처럼 평안하게, 기쁨으로 담대하게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강조합니다. 죽음이 왜 왔고, 죽음의 본질이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지기 위해서,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죽음이었기에 이제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책망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는 죽으리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웃음보다 슬픔이 낫다

 

셋째, 초상집에서 배우는 지혜는 웃음보다 슬픔이 낫습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슬픔 어린 얼굴이 그의 마음을 바로잡기 때문이다”(3절).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은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 또한 허무하다”(6 절). 세상의 지혜는 슬픔을 피하고, 웃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웃음보다 슬픔이 낫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울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진정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는 세상의 밑바닥에 비극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초상집에서의 슬픔을 깊이 경험해 본 사람만이 진정한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억지웃음을 만들어서라도 행복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초상집의 슬픔이 우리 마음을 어떻게 바로잡는지를 말씀합니다. 슬픔이 마음을 바로잡기 때문입니다. 초상집의 슬픔과 죽음이 우리 마음을 교정해 줍니다. 초상집의 슬픔에 참여하면 당장의 즐거움이 아니라 내일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구부리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13절). 곧게, 평탄하게, 편안하게, 아무 문제 없이 사는 인생도 있겠지만, 때로 인생이 굴곡집니다. 구부러집니다. 그로 인해 인생에 슬픔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그 슬픔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지혜를 얻어야 합니까? 많은 분이 건강에 위기가 옵니다. 때로는 암 선고를 받고,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는 진단도 받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제10장로 교회 목회자였던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가 “암으로 살 날이 3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고 성도들에게 작별 설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 굴곡을 놓으신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꾸시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구부리신 것을 바꾸려 한다면 예전만큼 선하지 않을 것이며, 상황이 더 악화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부리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습니까? 굽게 하심으로 주시는 슬픔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지혜를 얻고, 영원한 생명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구부리신 것을 다시 펴지 마십시오.” 한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지선 자매님은 2000년 7 중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화상을 입었습니다. 가해자의 음주운전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 그 자매님이 온누리교회에서 간증한 게 기억납니다. “하나님이 예전의 얼굴로 돌아갈 수 있게 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구부리신 것을 다시 펴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상태에 감사하며 기쁘게 살겠습니다.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이 마음으로 살기에 그 고통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자매님이 만약 “하나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소원했다면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과거로 돌아가게 해주시겠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구부리신 것을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여겼기에 그 고통을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제럴드 시처라는 크리스천 작가도 1991년 가을밤에 아내와 세 자녀와 어머니를 태우고 운전하던 중에 음주운전 차량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한순간에 아내와 네 살배기 딸과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엄청난 충격과 슬픔 속에서 몸부림치며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 과정을 모두 열거하며 쓴 책이 ‘ 위장된 은혜(A Grace Disguised)’ 입니다. 한국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울다’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심하게 구부린 것을 허락하셨다면 그 슬픔을 통해서 잔칫집에서 얻을 수 없는 지혜,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지혜를 얻게 하신 거라고 고백했습 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심하게 구부리신 사건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입니다. 가장 의로우신 분이 가장 불의한 자들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건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재판이 6번이나 이뤄졌습니다. 모든 증거가 조작되었고, 모든 증인이 매수되었습니다. 모든 판결이 거짓으로 이루어져서 가장 의로우신 분이 가장 불의한 재판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구부러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구부리신 것입니다. 불의한 죽음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부러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능력을 보여주셨고, 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구부러진 십자가의 슬픔을 깨달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슬픔을 깨달을 때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참된 기쁨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의 슬픔을 외면하고, 세상의 웃음으로 인생을 채우는 사람은 어리석은 웃음에 취해 살게 됩니다. 고난주간 찬송은 고난주간에만 부르는게 아닙니다. 십자가가 가져오는 슬픔을 직면해야 세상의 모든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부리시는 것을 우리가 펼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구부러짐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인생을 거꾸로 보는 렌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은 이유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삶의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묵상하며 우울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가장 지혜롭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교사이자 전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친구로 초대합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시작보다 마지막이 낫습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을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초상집에 먼저 가십시오. 그러면 우리 인생이 더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더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인생을 거꾸로 보는 렌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가 인생을 거꾸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뒤집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종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사건, 세상을 뒤집는 사건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역설은 인생을 거꾸로 보게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간 상실마저 축복이 되고, 엄청난 재난으로 인한 슬픔마저 감사의 제목으로 바꿉니다. 불행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손길로 바뀝니다. 십자가를 통해 인생을 거꾸로 보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생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일을 십자가의 지혜로 바라보며,

거꾸로 보는 인생의 지혜를 통해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