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즐겁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갈망은 역시 행복입니다. 행복이 실재하기에 갈망합니다. 사람들이 갈망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있습니다. 배고픔이 있다는 것은 배부름을 줄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모든 갈망은 그 대상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그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팔복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을 누리는 한 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복은 먼 미래에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복일뿐만 아니라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누리는 복입니다.
시편 1편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소개합니다. 시편의 서론이면서 전체를 요약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시편 1편은 6구절로 되어 있는데 1절이 히브리어 알파벳 첫 번째 단어로 시작하고, 6절 마지막 단어는 마지막 자음으로 끝납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ㄱ’ 으로 시작해서 ‘ㅎ’ 으로 끝나는 시적인 운율과 문학 적인 예술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행복을 원하는 모든 비밀, 원리, 진리를 담고 있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의 첫 단어는 ‘복이 있는 사람은’ 이라고 시작합니다.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복되도다”라는 감탄어입니다. 복수형으로 사용되어서 그 복의 상태가 쌓여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 참으로 복 되도다!”, “오, 놀라운 복들이여!”라며 복 있는 사람의 상태를 보고 탄성을 지르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실 때 개역개정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했는데, 우리말 번역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복 되도다”라고 시작합니다. “복 되다”는 탄성을 가장 앞세웠습니다.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실 때 시편 1편의 “복 되도다”라는 말씀을 이용하신 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이 가능하기에 “복 되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복이 없는 상태
많은 사람이 세상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보면서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행복은 없다, 불가능하다, 나의 상황과 형편을 보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면서 행복을 헛된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 1편은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는 삶이 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마지막 단어는 “망하리로다”입니다. 복된 인생에 대한 감탄으로 시작해서 망한 인생에 대한 탄식으로 끝납니다. 시편 1편은 모든 인생을 복된 인생과 망하는 인생으로 구분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의인의 길과 불행에 이르는 악인의 길입니다. 인생에는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길과 사탄의 길입니다. 아벨의 길과 가인의 길입니다. 축복의 길과 멸망의 길입니다. 시편 1편 1 절에서는 부정적인 표현을 먼저 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무엇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부정적 설명부터 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라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하지 않고” (1절). 행복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면서 복된 상태와 정반대인 상태를 먼저 설명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기 전에는 행복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부정적인 정죄로 시작합니다. 복음의 정수를 요약한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먼저 진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인간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만 칭송하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철저히 타락한 본질을 드러내고, 회개를 요청하며, 참된 행복으로 안내합니다. 그래서 1절이 “복 있는 사람은 이러하지 아니하며”라는 부정적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라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세 가지 표현이 점점 강화됩니다. 악인들의 꾀에서 죄인들의 길로, 오만한 자의 자리라는 표현으로 점층 되고 있습니다. 이 안에는 세 가지 점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점층은 ‘꾀’ 입니다. 생각의 단계에서 길이 되고, 그 길이 자리가 됩니다. 꾀는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다가오는 수많은 조언입니다. 악에서 나오는 꾀를 우리가 선택해서 행동하게 되고, 그 것을 반복하면 그것이 길이 됩니다. 그 길은 물리적인 길이 아닙니다. 생각의 길, 마음의 길, 행동의 길을 의미합니다. 길이란 많은 사람이 지나다녀서 굳어져서 생깁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꾀가 결국 길이 되고, 고착화 됩니다. 많은 사람이 마음의 길을 따르게 되면 그것이 고착됩니다. 이것을 ‘세계관’ 이라고 할 수 있고, ‘가치관’ 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한 시대를 사로잡는 ‘패러 다임’ 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점층은 ‘악인’ 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 다음에 ‘죄인’ 이 나오고, 그 다음에 ‘오 만한 자’가 나옵니다. 근본적인 것에서 점점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악은 하나님을 떠나있는 모든 상태입니다. 악의 상태에서 죄가 나오고, 죄의 가장 구체적이고 대표적인 모습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오만과 교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착하고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나있는 상태가 악의 상태라는 것은 깨닫지 못합니 다. 그 악에서 죄가 나오고, 그 죄의 대표적인 모습이 교만입니다. 세 번째 점층은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 따르다’가 ‘서다’가 되고, ‘ 다’ 가 ‘앉다’ 가 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게 되고, 죄인들의 길에 서게 되고, 그 다음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활동적인 것에서 비활동 적인 것으로 고정됩니다. 악과 죄가 우리를 점점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점점 굳어지게 만듭니다. 죄와 악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아서 삶을 포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점점 죄의 종 된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는 것 같고, 수많은 생각을 따라 사는 것 같지만, 결국 그 꾀를 따르고, 삶의 마지막은 주저앉게 됩니다.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주저 앉고, 마비됩니다. 죄의 포로가 된 것을 알지 못하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세상에 전혀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거룩한 삶을 조롱하고 비웃기만 합니다. 그렇게 주저앉은 것이 복된 상태와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는 인생은 복이 없는 상태입니다.
복 있는 사람의 상태
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는 자로다”(2절). 복된 사람들은 악한 자들의 꾀에 대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악한 꾀를 막지 못하면 죄인들의 발걸음이 되고,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상태가 되어서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가게 됩니다. 악한 꾀를 제거하지 못하면 그것이 삶의 길이 되고, 우리 삶에 고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악한 꾀를 제거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것들로 채워지지 않으면 악한 꾀가 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의 상태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 자체에 모든 것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워하는 것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즐거워하는 것을 이미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것을 즐거워한다면 이미 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길로 걸어 가고 있을 것입니다. 1절에서 말씀한 삶을 뒤집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앉아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가슴에 품고, 즐거워하면 우리는 의인들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악한 자의 꾀가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매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이자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즐거워하면서 행복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면 행복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읽는 것을 마음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성경 읽기를 고행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 읽기는 해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즐겁게 한 구절, 한 구절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에 늘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고, 우리 생각이 악한 꾀를 제거할 수 있는 자양분을 계속 공급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복에 이르는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나무’와 바람에 나는‘겨’
3절부터는 악한 꾀를 따르는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두 갈래 길을 비유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나는 겨’로 대조합니다. 히브리어로 발음을 보면 나무가 ‘예츠’고, 바람에 나는 겨는 ‘모츠’ 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계절에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이 시들지 않는 것처럼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3절).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열매를 맺고, 잎이 마르지 않는 이유는 뿌리가 물줄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형통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즐거워하는 말씀이 우리 삶을 통해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참된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내가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 때를 따라 적합하게 열매 맺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연령대, 어떤 시대를 살더라도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시대에도, 어떤 연령대라도 우리를 통해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늘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빨리 노년이 되고 싶다고 합니 다. 노인이 되어서는 젊었을 때가 좋았다고 합니다. 늘 후회 속에 살아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복은 청년이든, 중년이든, 노인이든, 건강하든, 쇠약하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두려워하는 환경은 없습니다. 어떤 상황, 연령, 시대에서도 열매 맺으며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인들은 종려나무처럼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자랄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심긴 사람들이니 우리 하나님의 뜰에서 번성할 것입니다. 그들은 노년에도 여전히 열매를 맺고 진액이 가득하고 싱싱할 것입니다”(시 92:12~14). 노년에도 여전히 열매 맺고 진액이 가득하고 싱싱할 것입니다. 영혼의 싱싱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내린 뿌리가 깊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 연령, 상황에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행복은 부산물입니다. 덤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지 못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그저 바람에 날려가는 겨와 같도다”(4절). 우리 인생이 왜 허무하게 느껴지냐면 껍데기 같은 ‘겨’ 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겨는 작은 바람도 견디지 못하고 날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허무함을 느끼는 까닭은 겨에 불과한 것을 붙잡고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을 즐거워하면 나의 행복은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겨처럼 날아가 버릴 것을 즐거워하겠습니까? 아니면 뿌리 깊은 나무가 시냇가에 심어져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에서 흘러나오는 진액을 공급받아 살 것입니까?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 ‘심판’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은 의인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리라.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보호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라”(5~6절). 왜 이런 역전이 일어났을까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자유로 무엇을 택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로운 만큼 심판이 기다립니다. 동물들은 본능을 따라 살기에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선택하며, 살았기에 심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완전히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감출 수 없고, 악은 조금도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심판 앞에 준비되지 않은 삶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행복은 죽음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죽음이 가장 큰 재앙처럼 다가온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이 행복으로 느껴지면 살아온 인생이 행복한 삶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그 ‘철’ 은 인생의 모든 순간입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가 정반대여야 합니다. 태어날 때 우리는 울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가족은 기뻐하고 환호하며 손뼉을 쳤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똑같은 모습이라면 그 사람은 불행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 땅을 떠날 때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울고, 두려워하고 떨고, 주변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환호한다면 불행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 땅을 떠날 때 우리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주변 사람이 어린 아이처럼 울어야 합니다. 그런 인생을 산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 앞에 준비된 삶이 행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성도들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받으나 악인들의 후손은 끊어질 것입니다”(시 37:28). 참된 행복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 땅을 삽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심판이 있다는 것을 늘 깨닫고, 그 심판 앞에서 삽니다. 그 심판을 견딜 수 있는 ‘의’ 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시냇가에 깊이 뿌리내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를 인용해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강물처럼 움직입니다. 정말 복을 받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시작뿐 아니라 끝도 숙고해야 합니다. 전체를 바라봐야 합니다. 인생은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고, 죽음 너머에서 벌어질 일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죽음을 꿰뚫어 보는 믿음이 없으 면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순간이 아무리 행복해도 죽음의 위협과 가능성은 언제나 있기 때문에 긴장을 풀 수가 없습니다.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상태입니다. 시편 기자는 참으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고려하는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제야 여러분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됩니다.” 죽음을 꿰뚫어 보는 믿음으로 죽음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이 참된 행복에 이르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삶이 가능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가져다주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즐겁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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