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참으로 자유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성령을 따라 삽니다.”
지난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는 자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입니다. 자유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무엇으로의 자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셨습니다. 애굽에서 끌어내셔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출애굽 자체가 목표가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만일 거기서 그쳤다면 광야에서의 방황에서 멈췄을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은 우리가 부활의 생명으로 성령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출애굽이 십자가의 모형이라면 가나안에서의 삶은 성령을 따라가는 삶의 모형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하지만, 십자가에 머 물러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과정입니다. 부활을 통해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새 생명의 삶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목적입니다.
참된 자유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는 진리를 보호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후반부에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진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삶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 다.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진리를 분리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강조하면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도외시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강조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외면합니다. 진리가 파편화될 때 우리는 온전한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서신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은 이 땅 가운데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 위에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삶을 인도하십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 것인지,
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를 선택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그러면 결코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욕망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16~18절). 우리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 것인지, 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를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이 싸움이 영적 삶입니다. 영적 삶이란 끊임없는 싸움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이 전혀 없다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갈등이 있다면 영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갈등 자체가 없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 사람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한 고민 자체가 없습니다. 그 고민 자체가 구원받았다는 증거일 가능성이 큽니다. 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 것인지 끊임없이 갈등한다면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지 구원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 육체’ 라는 단어는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옛사람의 본성의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죄된 본성입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어떤 필요와 욕구 자체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금욕주의가 그것입니다. 잘못된 방향입니다. 금욕주의는 몸의 행실을 제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영향력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도 의미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어느 한 영역의 행실을 죽일 수 있어도 또 다른 육체의 본성이 살아납니다. 먹지 않고, 보지 않고, 만나지 않고, 세상과 담을 쌓음으로써 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절대로 몸의 행실은 죽지 않습니다. 더 살아날 뿐입니다. 중세 시대 추악한 범죄들은 수도원 담벼락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몸을 단절시키고, 가혹하게 하는 것으로 육신의 본성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규율이나 법칙을 지킴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착각입니다. 율법주의가 거기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철저히 지킴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없습니다. 죄악 된 본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자기 의로 충만했습니까? 그들만큼 철저하게 율법 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 낸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 자체가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없습니다.
세 단계 ‘죄 죽이기’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 성령을 받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몸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실패합니다. 혼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도 실패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죄 죽이기’ 라고 했습니다.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믿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옛사람의 죽음으로 간주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옛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한 것입니다. 우리 옛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스스로 죽을 수 없고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옛사람의 죽음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 죽음으로 옛사람이 심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 과정 없이 죄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여긴다’는 단어 가 중요합니다. 사실을 사실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옛사람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나의 옛사람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나의 옛 사람에 대하여 죽음을 계속 선포하고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드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 안에 성령의 임재하심이 충만해집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령을 따라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단계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16절).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계속 그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한번의 선택이나 행위로 이 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선택을 지속할 때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발걸음을 걷습니 까?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걷는 것 자체가 힘들지만 조금씩 걷게 되면 힘을 얻습니다. 영적 생활을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일’과 성령의 ‘열매’
“육체의 일들은 명백합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종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 취함과 방탕과 또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 경고한 것처럼 지금도 경고합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19~21 절). 옛 자아는 죽었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히 살 아 있습니다. 육체의 일들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파괴합니까?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영역의 죄악들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이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원수, 다툼, 시기, 분노, 분열, 분파, 질투 등은 모두 관계를 깨뜨리는 사회적 죄악들입니다. 방탕한 사회적인 문화도 있습니다. 술 취함, 방탕함 등 육체적인 일들을 성령의 열매와 대조하면 전쟁터에서 마주한 군대 같습니다. 육체의 일들을 여러 개 나열한 다음에 마지막에 “또 이와 같은 것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열거할 게 참 많은데 지면이 짧아서 이 정도로 하자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입니다. 육체의 ‘일’ 과 성령의 ‘ 열매’ 라고 표현한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 ‘육체의 열매’ 라고 하지 않고, 또 ‘ 령의 일’ 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육체에 관한 것은 즉각적입니다. 순간적이고,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화내는데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분노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일’ 입니다. 그런데 오래 참는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마음속에 올라오는 분노를 억제하고, 참고 또 참아서 끝냅니다.
열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점진적입니다. 수많은 선택이 반복되어야 형성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9가지인 데 왜 단수로 썼을까요?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것은 의도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모든 열매가 하나로 연결 되어 있고, 한 열매가 또 다른 열매를 만들어내는 데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열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인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가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나머지 열매들을 사랑의 열매로 풀어서 표현하고자 합니다. 기쁨, 희락의 열매는 행복한 사랑입니다. 환경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주시는 기쁨의 행복입니다. 화평은 하나가 된 사랑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인내하는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의 열매에서 중요한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자비는 친절한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줄 마음과 방법을 찾는 친절입니다. 양선이란 이기심이 없는 착한 사랑입니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사랑입니다. 충성이란 책임감 있는 사랑입니다. 온유란 겸손한 사랑입니다. 절제란 훈련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을 내어 드릴 수 있는 통제력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열매로 시작해서 그 절정이 절제로 끝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만한 사랑은 절제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무분별한 사랑 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사랑이기에 때로 징계하시고, 심판 하시고, 우리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분별력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절제가 없다면 악의 도 구가될 가능성이 큽니다.
누군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사랑이 절제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사탄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열매는 절제까지 포함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3절에서 “이런 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환경, 대상, 상황이 열매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열매는 나타납니다. 성령의 은사는 평생 단 한 번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라질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은사는 전적인 성령의 주권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은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있다가도 사라질 수 있고, 없다가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열매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나타납니다. 사랑의 열매는 불법 재판으로 십자가에 넘겨주고 모욕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에게서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사랑의 열매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억지로 용서하신 게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로 용서가 흘러나온 것입니다. 진심의 용서입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희락의 열매는 감옥에 갇혀 있는 가운데서도 “기뻐하라.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한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화평의 열매는 핍박과 시험에 직면해서 분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던 야고보에게서 나타납니다. 인내의 열매는 히브리서에 나타납니다. 핍박 속에서도 오래 참고 인내하는 성도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순교의 시험과 위험 속에서도 인내하며 그 시험과 순교를 이겨낸 성도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자비의 열매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소동하고 거센 반항으로 힘들게 했던 그들 가운데 유순한 유모처럼 나타났습니다. 양선의 열매는 바나바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에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착한 사랑의 열매 때문에 바나바가 바울을 돕 는 중요한 협력자 역할을 했습니다. 충성의 열매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서머나교회가 맺었습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충성스럽게 믿음을 지킴으로 책망받지 않았던 교회입니다. 온유의 열매는 스데반 집사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자신을 돌로 쳐 죽이려는 무리 앞에서 누가는 스데반 집사의 얼굴을 주목합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 모여든 군중 앞에서 언론을 의식해서 얼굴을 꾸민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두렵고 떨리는데 천사같은 표정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돌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 앞에서 온유한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돌이 날아와도 온유함의 열매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천사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의 열매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끊임없이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절제입니다. 이 모든 열매는 한 번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 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천, 순종, 계속 그 길을 걸어갈 때 성령의 능력 가운데 열매가 맺어집니다. 한 열매가 또 다른 열매를 맺고, 사랑이 희락의 열매를, 희락이 오래 참음의 열 매를, 오래 참음이 자비와 양선의 열매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합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삶은 분명 또다시 죄의 종이 될 뿐 만 아니라 율법의 종이 되고, 자유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는 말씀처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참으로 자유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성령을 따라 삽니다. 이 축복을 누림으로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가 충만하게 맺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위치에 우리를 두셨으니,
끊임없는 믿음의 선택으로 성령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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