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자유함으로 사랑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1, 13~15)

새벽지기1 2021. 12. 11. 07:51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올려지고,

사랑으로 이웃에게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구원의 축복은 자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속되고 자유를 잃어버리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정반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은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절).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정치적, 제도적, 이념적 해방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 율법, 사단의 권세 아래 종 되었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 옛사람을 함께 죽게 하고,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임하게 함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셨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를 떠올리면 하나의 반복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리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어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발견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려고 했습니 다. 사도 시대부터 끊임없이 존재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의 진리를 드러냈을 때 에라스무스라는 당시 유명한 인문학자가 반박했습니다. 1524년 9월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을 써서 인간이 비록 타락했지만, 인간의 구원에 선한 행실과 자유의지가 참여하고, 이루어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노예의 지론>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의지는 전적으로 타락했고, 비록 선한 행실일지라도 죄악의 분류를 벗어나지 못하며, 도리어 인간은 선한 행실을 하면서 또 다른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이 두 사람 사이에 격렬하게 일어났습니다. 이 논쟁은 초대교회 역사 에서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라는 사람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습니다. 당시 논쟁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는 인쇄술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그 주장들이 발표되고 반박하는 논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 상태를 ‘ 죄의 종’ 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아무리 선한 행실일지라도 인간은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죄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정치적, 제도적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을 보십시오. 정치적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수많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의 이면에서 인간이 얼마나 포로된 상태인지가 나타납니다. 사람들 스스로 자유롭다고 하지만 종의 상태이고, 자유가 주어져도 올바로 누리지도 못합니다. 중세 시대만 해도 개인의 자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철저한 신분 사회여서 노예로 태어난 사람은 노예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근대로 넘어서면서 자유가 주어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던 시대에 자유를 갈구하며 싸웠던 사람들이 정작 자유가 주어졌는데 누리지 못했습니다. 전 세계 여기저기서 일어난 독재에 순응하고 지지했습니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에도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람들 은 자유가 주어져도 제대로 행사할 줄 모릅니다. 누리지 못합니다. 왕정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왕 되신 민족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방 나라처럼 왕정 제도를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창조 질서대로 통치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르셨는데, 그들은 세상의 질서대로 왕정 제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현대 사회는 어떻습니까? 정치적, 제도적으로 자유를 누린다고 하는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온갖 타락한 문화의 종이 되어서 몸은 자유롭지만 마음은 종이 되어 있습니다. 진정 자유한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멈출 수 있느냐입니다. 탐심과 욕구를 내려놓을 수 있느냐입니다. 내려놓을 수 없다면 자유가 아닙니다. 종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몸은 자유롭지만, 마음과 영혼은 여전히 노예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유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는 대답을 가장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선택으로 인해서 종, 노예, 포로가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선택의 자유로 인하여 사람들이 갇혀 있고, 의지가 자유를 잃어버린 종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죄와 사망, 율법 아래 사단의 종노릇 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유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두려움 없는 양심의 자유

 

여러분, 자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두려움 없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육체 활동이 멈추는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 세계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양심이 자유합니다. 죄가 없다고 뻔뻔하게 여기는 양심이 아닙니다. 부끄럽고 연약한 죄의 모습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덧입어 값없이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양심을 공격합니다. 근거 있게 공격하고, 근거가 없어도 공격합니다. 근거 없는 거짓으로도 공격하지만, 우리의 잘못된 행실과 죄악을 공격합니다. 죄책감을 가지게 합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그 죄에 머물게 합니다. 생명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양심이 공격을 받아 무너진 것입니다. 심한 죄책감, 두려움, 불안 등은 양심이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과 이념들은 “너만 그런 거 아니니까 괜찮아, 당당해. 사람들에게 미움받아도 돼”라고 말하면서 양심의 소리를 둔감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모든 이념과 사상은 인간의 양심을 달래주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함으로써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괜찮은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길을 무감 각하게 만들고, 마비시킴으로써 양심에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 앞에 우리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 앞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양심이 깨달아야 합니 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는 양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했기 때문입니 다”(롬 8:1~2).

 

‘정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 덕분입니다. 예수님이 해결해 주신 은혜를 믿음으로 우리는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하면 부모에게 야단맞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에게 “너는 분명 잘못했다. 아주 큰 잘못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의 자녀다. 네가 잘못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존재이다. 너의 잘못을 내가 책임진다. 내가 해결하마. 내가 용서하마.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는 부모로 인해서 그 자녀가 분명 잘못했지만, 양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고, 그리스도 십자가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즐겁게 순종하는 자유

 

둘째, 즐겁게 순종하는 자유입니다. 순종이란 단어와 자유라는 단어는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이 마틴 루터를 공격한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면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반대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율’ 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자율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자신이 최고의 권위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질서를 순응하는 모든 삶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되려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고, 즐겁게 순종하고, 그 질서의 울타리 안에 살아야 합니다. 즐겁게 순종하는 그 자체가 자유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했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했습니다. 그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 과를 먹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 그 밖에는 무한대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금지명령 외에 모든 것이 자유입니다. 단 한가지 금지명령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 질서 아래서만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은 도전, 반역,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자율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스스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만이 온전히 자율적인 분이고,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규칙, 법칙, 제도를 깨뜨림으로써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한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인간 안에는 하나님 없는 자율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휩쓰는 가장 중요한 이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창조를 부정합니다. 어떻게든 창조가 아닌 것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성질서도 바꾸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로 주어진 질서가 아니라 스스로 성을 부여하겠다는 사회적 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남자와 여자 외에 제3의 성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제한과 규칙,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과 질서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와 질서에 기쁘게 순응할수록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유롭게 하심으로 기쁘게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죄의 종인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은 자유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벌 받을까 봐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즐거워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유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

 

셋째,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입니다. “형제들이여,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체의 만족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도리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한마디 말씀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삼키면 피차 멸망할 것이니 조심하십시오”(13~15절). 자유를 육체의 만족을 위한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릇하려고 사용해야 합니다. 자유의 방향과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 없는 양심의 자유, 하나님께 즐겁게 순종하는 자유의 열매는 이웃을 향하여 서로 종노릇 하는 자유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우상의 제물에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그 자유를 깨닫지 못하고 혹시 고기에 귀신이 붙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먹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먹을 수 있다. 그럴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그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의 마음을 시험들게 하고, 힘들게 하고, 믿음에 영향을 준다면 나는 먹지 않겠다.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자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믿음을 얼 마나 배려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할례 문제에서는 상반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디모 데에게는 할례를 행하게 했고, 디도는 하지 않게 했습니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은 관습이나 유대 문화 때문에 디모데가 따돌림을 당할까봐 그랬습니다. 디도에게는 할례를 통해 의롭게 된다는 잘못된 신앙의 변질이 있기 때문에 받지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유의 방향입니다.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 믿음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섬기는 데 자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자발적으로 나타난 사랑이어야 합니다. 강요된 섬김은 섬김일 수 없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에서 나온 사랑, 자유에서 나온 섬김으로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는 종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자유로운 그분의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셔도 의롭고 공의로운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예수 그리 스도가 자유로운 선택과 사랑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강요나 억울함이 아닙니다. 스스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자유를 사랑으로 섬기는데 쓰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유를 사랑으로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자유롭게 만나는 믿음을 회복하고, 믿음 안에서 자유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사랑으로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믿음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상으로 하나님에게 올리워지며 사랑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하로 이웃에게로 내려간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사랑 가운데 머문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올려집니다.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이웃에게까지 내려가야 합니 다. 바로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