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분을 경배하고, 높이고, 기뻐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진정한 영광이 나타난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고 기뻐하며 경배하는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고 바라보는 세상의 영광은 더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과 탁월한 지식과 기술로 인하여 누리는 영광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무 수고 없이 누군가 누린다면 헛된 영광이요, 거짓된 영광입니다.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이 스스로의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의미 있는 영광이고, 누군가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그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영광은 그 누구에게도 좌절과 절망과 부러움을 주지 않습니다. 진정한 영광은 오히려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 주고, 그들에게 새 힘과 용기, 소망을 줍니다.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영광은 그런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에게 부러움을 만들지 않고, 좌절과 절망을 주지 않고, 도전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에게 소망이 되고 깊은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을 일으키는 영광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탄이 바로 그 영광이 우리에게 비춰진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님을 알리는 책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영광’ 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영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 전체가 이 영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살 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고,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친밀했습니다. 요한이 자신을 표현할 때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있던 자’ 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과 가까이 동행했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았던 그가 “예수님에게서 영광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도대체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영광을 보았기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우리’ 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과 살았던 제자들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않은 자는 예수님을 예배할 수 없고, 경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 꿇을 수 없습니다. 성탄이 기쁠 수 없습니다. 그저 문화일 뿐이고 분위기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본 사람에게만 성탄이 기쁨의 소식이요, 소망의 사건이며, 마땅히 경배해야 할 사건입니다.
성탄의 영광이 십자가의 영광으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을 소개할 때 기적들을 통해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 이라는 단어가 14번이나 사용된 곳이 ‘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할 때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십자가의 죽음이 곧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순간이며,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탄의 영광이 십자가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그 영광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겸손에서 나타났 습니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섬기는 종으로 나타내는 영광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에서,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시는 희생에서 나타나는 영광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자신을 지극히 낮추심에서 나타나는 영광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 세상의 영광과 달리 자신을 낮추고 낮춰서 죽기까지 낮아지 심으로 나타나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 이 모든 이들을 살리고,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고,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주는 영광의 빛입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요한은 그 영광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 니다. 첫째,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독생자’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다섯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헬라어로는 ‘모노게네스’ 입니다. 영어 ‘ 모노(mono)’는 단일한, 유일한, 홀로 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게네스’는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과거 사도신경에서는 ‘외아들’ 이라고 번역했는데, 불충분하고,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번역입니다. 그래서 새 번역에서는 ‘유일하신 아들’ 이라고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홀로 유일하게 존재하신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Glory as of the only Son from the Father)’은 영어 번역에서 ‘as’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아들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나타내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영광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에 계시는 독생자께서 하나님을 알려 주셨습니다”(18절). 제자들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알게 되었고,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영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했고, 보려고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차원의 존재는 상위 존재가 하위 존재에게 알려 주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독생자의 영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존재에서 나타납니다.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독생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은 눈으로 보고, 무릎을 꿇고, 경배가 일어나게 합니다. 만왕의 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과 관념으로 아는 것 자체로는 예배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가정과 삶, 마음에 임해서 우리가 그 영광 앞에 경배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독생자의 영광으로 우리에게 나타났기에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영광
둘째,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영광입니다. 말씀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 로고스’입니다. 당시 헬레니즘을 형성하는 스토아철학에서는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이성, 인격적이며 보편적인 이성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떤 메커니즘이 있으며, 어떤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절대적인 인격적인 이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을 ‘로고스’ 라고 부른 것입니다. 로고스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절대적 이성이 있지 않으면 이 세상이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로고스’ 라고 불렀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헬라 문화에 익숙했던 이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로고스’ 라는 단어를 차용했습니다.“당신들이 로고스라고 부르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시 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 “로고스가 하나님이시고,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충격적인 말입니다. 단지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하지 않고, ‘사륵스’ , 육체 덩어리를 뜻하는 단어를 쓴 것은 충격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에 빠져서 ‘몸 이 악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당시 이원론에 빠졌던 많은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설명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 마 세마’ 입니다. ‘ 마’ 는 몸이고, ‘ 세마’ 는 무덤입니다. 몸은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악한 것이므로 금욕을 해야 하고, 억제해야 하고,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정신세계의 깨달음으로 만들었던 초대 교회 이단 영지주의 철학입니다. 요한일서에서 그것을 반박합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말씀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육체를 악하다고 여 겼기 때문입니다. 로고스가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적인 선언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건을 설명하는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독생자가 육신을 입어야만 했습니까? 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과학적인 설명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 독생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그 이유는 죄에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독생자가 육신을 입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형태와 상태의 변화는 있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상태로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여전히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분으로 사람이 되셨다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입으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을 수 있는가?”,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분과 동일한 본질일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수백 년 동안 토론하고, 항의하고, 논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 비슷한 본질이 맞지 않냐?”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동질이라는 단어가 ‘호모우시우스’입니다. 비슷한 단어가 ‘호모이우시우스’ 입니다. '이’ 만 가운데에 붙이면 비슷한 본질이 됩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 자를 붙이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의 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완전한 사람으로 완전한 육체를 입지 않으시면 우리를 대신하는 대속 제물이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몸만 입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입으셔서 온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되었다’ 는 것은 취소할 수 없는 완료된 행동입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잠시 몸만 입 었다가 돌아가는 형태가 아니라 그분은 성육신하신 몸으로 이 땅에 사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성육신하신 몸이 부활하신 것이고, 그 몸이 승천하신 것이고, 그 몸이 다시 오실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몸으로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몸으로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거할 것이 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독생자 하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셔서 영원히 그 몸을 입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몸으로 거하시기를 택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우리에게 영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거한다’ 는 말은‘ '장막을 친다 ’ , ‘ 텐트를 친다’ 는 의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를 산으로 부르십니다. 시내 산에서 부르십니다. 출애굽기 후반부에 보면 장막에 대한 청사진을 주면서 레위기에서는 텐트에서, 장막에서 만나십니다. 내려오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늘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출애굽기에서 산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레위기에서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장막 가운데 거하시며 백성을 만나는 회막을 만드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임재를 위해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손으로 만지고, 주목하 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와 친밀하게 교통을 나누시는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 안에 계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 안에서 바라보고 주목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영광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
셋째,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영광입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독생자 안에서 은혜와 진리는 완전히 하나 되고, 완전히 충만합니다. 타락한 죄는 은혜와 진리를 분리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은혜와 진리가 공존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공존이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십시오. 자신의 잘못에는 한없는 은혜를 적용하고, 진리는 꺼내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에는 은혜를 꺼내지 않고, 진리만 들이댑니다. 세상의 다툼과 분열, 미움과 상처가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타락한 세상에서는 분리됩니다.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도 은혜파와 진리파가 싸웁니다. 은혜파는 “덮고 넘어가 자”, 진리파는 “바르게 바로잡자”고 합니다. 양쪽 말을 들어 보면 다 맞습니다. 그런데 은혜파에 가면 진리가 없고, 진리파에 가면 은혜가 없습니다. 타락한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공존조차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독생자의 영광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참된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은혜란 진리의 기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은혜가 될 때는 진리가 요구하는 기준에 합당 하지 못한 불의한 일을 진리이신 그분이 대신 담당하시고, 대가를 치르심으로 진리를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진리가 없는 은혜란 값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진리 앞에서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은혜가 왜 필요한지를 깨닫는 이들에게 진리를 대신 감당해주시는 독생자의 희생으 로 진리를 값없이 여겨주셔야 합니다. 참된 은혜는 값비싼 은혜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진리를 행할 수 없는 이들이 진리를 행할 수 있게 해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값없이 의롭게 된 자들이 성령을 따라 삶으로 진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진리 없이 은혜가 은혜 될 수 없고, 은혜 없이 진리가 진리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진리는 은혜를 추구하고, 참된 은혜는 진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줍니다. 은혜를 축소시키면 구원의 소망이 없어 집니다. 진리를 축소시키면 구원의 필요성이 없어집니다. 진리는 죄를 미워하고, 은혜는 죄인을 사랑합니다. 이 두 가지가 십자가에서 만납니다. 십자가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의 징벌을 담당하심으로 진리의 요구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신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은혜 를 베풀어 주시는 사건입니다.
여러분, 왜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을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은 최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그 어떤 선물보다 중요하고, 가장 고귀하고 값비쌉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하나님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분을 기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선물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분을 높여야 합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뻐해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날마다 그리고 영원히 경배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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