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의무에서 기쁨으로 (빌립보서 1:12~18)

새벽지기1 2022. 1. 8. 06:53

“삶의 의무가 기쁨이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온 세상에 복음 전하는 의무가

기쁨이 되는 온누리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인생에는 피할 수 없이 주어지는 의무가 있습니다. 가족이 서로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고, 국민이 국가에 가지는 의무가 있습니다. 기업 종사자가 고용계약에 따르는 의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영적 의무가 있습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세 종류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의무를 저버리고 살아가는 사람’ 입니다. 무책임하게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자신의 의무를 어쩔 수 없이 지고 가는 사람’ 입니다. 억지로 감당하기에 마음에 늘 불평이 가득합니다. 원망과 쓴 뿌리, 상처가 가득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자신의 의무를 기쁨으로 바꾸어가는 사람들’ 입니다. 가족의 의무, 국민의 의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고, 섬김과 나눔이 기쁨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많은 의무가 떠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무를 주신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짐을 지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려고 의무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가 기쁨이 되는 한 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듀티(duty)’가 ‘딜라이트(delight)’ 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삶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것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쉽게 의무가 기쁨으로 변화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특히 고난을 만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을 만나면 의무가 짐이 되고, 의무를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의무감으로는 고난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의무감으로만 일하는 사람은 억울한 일, 고난을 당하게 되면 늘 뒤로 물러서게 되고, 불평으로 쓰러집니다.

 

감당하기 힘든 의무가 기쁨으로

 

빌립보서에 나타난 바울의 기쁨은 그에게 좋은 일, 그가 원하는 일, 형통의 환경에서 경험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감당하기 힘든 의무가 기쁨으로 변하는 고백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은 많은 시간 고난을 경험했고,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의무감이었다면 바울은 그 기쁨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전파의 의무가 기쁨이 되었고,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하고 싶은 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그는 매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누구도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의무가 기쁨으로 변화된 것은 자신의 능력을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의무가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참된 교회 모습이자 성도의 모습

 

“형제들이여, 내가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12절). 사도 바울이 감옥에 매이는 고난을 통해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알리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열심히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도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 졌지만, 자신이 갇혀 있는 매임을 통해서도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상황은 우리 일상의 큰 장애물이요, 고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재난을 통해서도 선한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대재앙이나 대재난, 혹은 세계대전 같은 큰 전쟁 이후 영적인 부흥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대재앙과 대재난이 왜 일어납니까? 인간의 높아진 교만, 하나님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인간들의 완악한 마음이 자초한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그것이 전쟁을 만들었고, 재앙을 만들었고, 재난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은 재난과 재앙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고,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계기로 삼으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재앙 이후 하나님이 대한민 국에 놀라운 영적 부흥을 일으킬 것입니다. ‘놀라운 영적 대부흥의 전초전으로 하나님이 팬데믹을 사용하고 계시다’ 라고 믿어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선교에도 큰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이 팬데믹을 통하여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닫히고, 매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복음의 역사를 이뤄가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도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교회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의무나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것을 가장 기뻐하는 교회입니다. 의무나 짐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참된 교회 모습이자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전하는 소식에 귀기 울이기보다 그 모습을 먼저 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성탄의 메시지를 듣기보다 과연 성도들이 성탄을 기뻐하고 있는지를 먼저 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귀기울이기보다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성도 들의 모습을 먼저 봅니다. 사람들이 왜 부활을 믿지 않습니까?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성도들의 모습에 놀람과 감격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일이 의무감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교회가 온누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매임을 통해 복음이

 

바울은 자신의 매임으로 인해서 세 가지 모습으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보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의 매임을 통해 복음이 로마의 친위대와 그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증거되는 진보를 가져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슬에 매인 것이 온 친위대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돼”(13절).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가 실라와 함께 기도하며 찬미 했을 때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는 간수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로마 감옥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굳게 갇혀있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났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굳게 닫힌 감옥 문을 통해서 로마의 친위대와 주변에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만일 바울이 그곳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상황과 대화를 하면서 바울이 불법적인 일을 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친위대와 주변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매임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복음의 진보였기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형제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된 기쁨

 

둘째, 바울의 매임을 통해서 많은 형제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으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내가 매임으로 인해서 주를 신뢰함으로 두려움 없이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14절). 자유롭게 사는 우리는 매임을 통해 복음이 역사한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전파를 가로 막는 세계관 속에 살아가는 국가에서는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교회들은 복음이 잘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탄압과 억압 속에 있는 환경에서 도리어 매임을 통해 복음의 역 사가 능력있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공산주의 체제 가운데 있는 교회에서 이런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동유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구금하고, 고문하고, 처형했을 때 교회가 쇠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억압은 복음의 문을 닫지 못하고 도리어 권력의 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쿠바의 카스트로 독재정권이 교회를 짓밟으려고 무수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1994년 통계로 감리교가 6,000명 미만에서 5만 명 이상으로 성장했습니다. 1930~40년대 나치 정권의 왜곡된 철학과 악에 맞서 싸웠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본 회퍼 같은 믿음의 형제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더욱 담대하게 복음의 진보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금 중국 정부가 복음전파를 막으려고 교회를 금지하고, 성경을 다시 쓰려고 하고, 교회들을 억압하고 있지만,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매이면 매일수록 하나님 나라 복음의 역사가 더 능력있게 나타나는 결과를 빚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시대 모든 선교사가 추방되었고, 중국 선교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수많은 가정교회를 통해서 중국이 복음화 되고 있는 것처럼,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교회를 문을 닫게 하는 핍박이 결코 복음전파의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수많은 교회 들이 확장되고, 복음이 증거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매임을 통해서도 복음이 더욱 증거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하지 못한 동기라도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셋째, 바울에게 경쟁심과 시기심을 가지고 일하던 사람들이 바울이 매여 있는 것을 보고 선하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나는 이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또 어떤 이들은 좋은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좋은 뜻으로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움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전파하지만 시기와 다툼으로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갇힌 것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이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입니다”(15~18절).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어떤 이들은 일부 가식과 시기, 다툼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저들의 마음속에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있을지라도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기뻐하겠다”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순수하지 못한 동기는 언제나 미화시키고 포장하 고 감춥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비치는 순수하지 못한 동기는 언제나 크게 보이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정반대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 있는 동기는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살피고, 정직하게 나아가지만, 다른 사람의 동기는 하나님께 맡기고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기뻐하겠다는 것이 그의 영적 태도입니다.

 

한 침례교회가 어려움이 있어서 부천온누리교회로 변화시켰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 일을 제가 했습니다. 당시 부천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 목사님들을 찾아다니면서 “여기 있던 교회가 부천온누리교회로 전환되게 되었습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어느 중형교회 목사님이 그 교회가 온누리교회로 전환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안 좋았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옮겨 갈까봐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전보다 설교를 더 열심히 준비하고, 기도도 더 많이 하고, 성도들을 더 열심히 돌보게 되면서 교회가 더욱 안정되었다고 했습니다. 분명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경쟁 같은 마음이 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 주변 교회들이 모두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었습니 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선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바울의 복음전파의 의무가 어떻게 기쁨이 되었습니까? 자기만족의 기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매임, 억울함, 연약함, 불완전함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 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역을 보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고, 자신의 매인 환경을 통해서도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환경, 좋은 일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불행처럼 보이는 일, 우리의 발목을 잡는 매이는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선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통해서도 선한 역사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복음전파의 문이 닫힌 것 같지만, 하나님은 팬데믹을 통해서도 복음전파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가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2022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의무가 짐이나 부담, 피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파하기를 바랍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의무가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온누리교회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

올 한 해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매인 것과 같은 답답하고, 억울하고, 억눌리고, 고난 가운데 처한 상황일지라도

기뻐하며 모든 삶의 의무를 기쁨으로 바꾸어가는 한 해 되게 하옵소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도록 명하신 그 부르심 앞에 의무를 다하는 교회가 되고,

그 의무가 곧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