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다시 새롭게 소명을 따라 (요한복음 21:15~17)

새벽지기1 2022. 1. 22. 22:27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닙니다.

주님이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다시 소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은 과거에 대한 상처와 기억 때문입니다. 자신의 실패에 대한 기억은 잠재력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실패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은 어디 있습니까? 어떤 결심이나 노력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실 때 과거의 실패를 직면할 수 있습니다. 때로 그것이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회복에 이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일정에는 실패한 베드로를 만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책임을 추궁하거나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의 가장 큰 실패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을 공적으로 세 번씩이나 부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경고하시고 교훈했는데도 베드로는 자만했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가 베드로의 실패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제자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실패의 늪에 빠진 베드로를 다시 새롭게 하셔서 소명을 따라 살아가도록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베드로를 회복시키는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과거 실패에 대한 기억, 상처의 늪에서 우리를 건져서 다시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로 새롭게 살게 하십니다.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요한복음 21장은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21장 3절에 보면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따라나섰습니다. 물고기 잡으러가는 모습을 굳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는 요한복음 21장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생계를 해결하는 문제로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도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과거 평 범한 어부의 생활로 돌아가겠다는 표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도 그 가운데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제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실패에 대한 자책감, 절망감 때문입니다. 더이상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감으로써 예수님을 부인한 과거 실패의 기억들을 억누르려고 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실패의 기억을 억누르려고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를 따라 나서는 다른 제자들에게도 베드로의 실패에 대한 자기 포기가 전염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의 늪에 빠진 베드로,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갈망보다 피하고 싶은 마음에 빠진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세 가지 준비를 하셨습니다.

 

빈 그물과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첫째, 빈 그물입니다. 베드로가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호수에 갔습니다. 깊은 밤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물을 올릴 때마다 빈 그물이 올라왔습니다. 빈 그물이 올라올 때마다 베드로는 심상치 않은 일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3년 전 일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계속 빈 그물이 올라왔습니다. 베드로가 동생 안드레에게 예수님을 소개받았는데,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관심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을 때 베드로는 여느 때처럼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빈 그물에 붙어 있는 쓰레기만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시고 “깊은 데 그물을 던져라”고 하셨습니다. 밤새도록 빈 그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실패 속에 있을 때 예수님이 “깊은데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자존심을 꺾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 출신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다시 내리라”는 말씀은 그물을 다시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체리듬이 깨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아침에는 깊은 데 물고기 가 몰리지 않는 법입니다. 또다시 그물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렸습니다. 개역개정 번역에서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종적이고 거룩한 느낌을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냉소적인 마음으로 “한번 해 봅시다”는 마음으로 던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심과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베드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그 계기는 베드로의 실패였습니다. 그물이 비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빈 그물이 올라올 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어떻게 따르게 되었는지를 다시 기억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을 때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입니다.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서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이 많습니다. 인생에 좋은 일이 생겼을 때 ‘ 예수님이 나를 축복하셨구나’ 라며 교회 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깊은 실패와 좌절, 절망을 경험하면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일이 있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실패 속에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온 많은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했습니까?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홀로 외로운 도망길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 그물이 비었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가 어떻게 제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그물을 내렸지만 계속 빈 채 올라왔을 때 베드로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 날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때 배에서 90m 떨어진 곳에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물고기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그때 사도 요한이 예 수님의 음성임을 알고 “주님이시다”라고 외치고 겉옷을 두르고 물속에 뛰어드는 것으로 장면이 끝납니다. 베드로는 매우 당황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으로 흥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3년 전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의 삶을 시작했을 때를 경험하면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숯불과 실패의 기억

 

둘째, 숯불입니다. 장면이 바뀌어서 제자들이 육지로 올라와 보니 예수님이 불을 피워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숯불’ 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됩니다. 요한 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곳이 숯불 앞입니다. 예수님을 무고하게 불법적으로 재판에 넘기며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베드로가 추위를 녹이려고 원수들의 틈에 섞여서 숯불에 자신의 몸을 녹이고 있었던 바로 그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피워 놓은 숯불을 보면서 자신의 실패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숯불의 이미지가 자신의 실패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그의 양심을 뜨겁게 만들고,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 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셨지만, 숯불이라는 이미지에 베드로의 실패가 투영된 것입니다. 무언의 설교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아침 먹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위해서 직접 요리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베드로의 발을 씻겨 주셨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배반하고 실패한 베드로를 위해 아침 식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입장이었다면 배반한 사람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만들 마음 이 생기겠습니까? 이것이 참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실패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깊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신 장면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2002년 하용조 목사님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제가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저의 역할은 하용조 목사님을 잘 보필하고, 목사님의 건강이나 신변의 안전에 어려움이 없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일정이 매우 고됐습니다. 파키스탄에서 비자 때문에 여러 날을 대기하고, UN기를 빌려 타고 가는 여정이 힘들어서 제가 피곤했나 봅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하용조목사님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어디서 꺾으셨는지 꽃도 한 송이 놓아두셨습니다. 마치 집에서 준비한 식사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황송했는지 모릅니다. 다음에는 제가 꼭 먼저 일어나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일어나셔서 다 차려 놓으셨습니다. 참 멋진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는데 거기에는 무언의 설교가 담겨 있었습니다. 빈 그물로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를 떠올리게 하셨고, 숯불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세 번의 질문과 교훈 그리고 회복

 

셋째, 세 번의 질문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세 번 연속 던지실 때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페트라’ , ‘ 반석’ 이라는 뜻입니다. 바위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베드로가 “주는 그 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 고백을 향하여 “너는 반석과 같은 신앙고백의 사람이 되어라. 이 반석이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라며 부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실패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 시몬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붙여주신 ‘베드로’ 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제자 이전의 ‘시몬’ 이라는 이름을 부르신 것은 이것 또한 실패를 지적하고 드러내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시고, 늘 베드로라고 부르시던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하신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둘째,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늘 그렇게 주장하고, 그렇게 생각했던 방식을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늘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렇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늘 나서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밤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을 때 자신은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의 실패 원인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교만입니다. 베드로가 왜 실패했습니까? 늘 자신이 최고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지적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 속에 베드로의 실패 원인에 대한 지적이 담겨 있고, 베드로를 회복의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씻어주듯이 세 번의 사랑을 질문하시며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마음을 모두 아시는 주님께 판정을 맡겼습니다. “예, 주여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17절). 자신의 모든 실패를 아시고,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베드로가 응답하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의 마음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는 의미 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께서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아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겸손이요, 진실입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근심’은 회개에 이르는 슬픔이 담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던진 세 번의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회개에 이르렀고, 깊은 슬픔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너무 쉽게 실패하는 사랑인 것을 알지만 예수님은 그 진실을 받으시고 “다시 시작하자. 내 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에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런 데 이제는 “내 양을 먹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소명이 바뀐 것입니까? 아닙니다. 추가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목양의 소명을 더해 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에 더해서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목양의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회복시켜 주시는 성령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실패한 모든 제자들이 그 실패를 통해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켜 소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여러분, 과거의 실패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이 주신 소명 앞에 합당하지 못하게 절망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실패도 치유하시고, 소명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가 아무리 절망적이고, 우리의 상처가 아무리 뿌리 깊다 할지라 도 예수님이 회복시켜서 그분을 따르는 소명에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손상한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를 다시 소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를 다시 부르신 것처럼 부르심과 소명을 따라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 되기 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주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