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참된 경건 (야고보서 1:19~27)

새벽지기1 2022. 2. 26. 07:43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고,

보호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돕고,

자신을 지켜 가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미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강림 역사를 체험한 성도들이 핍박 가운데 흩어져 시험받고 있었는데 그들을 권면하는 서신입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체험한 이들로서 공감대를 이루는 신앙의 기초 위에서 시험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것인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 문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경건’ 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경건이라는 단어를 ‘religion’ 이라고 번역했는데 통상적으로 ‘종교’ 라고 번역합니다. 이때는 종교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신앙’ 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 원어적인 의미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 혹은 ‘하나님을 두려워함 ’ , ‘하나님을 예배함’ 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을 경외 하는 신앙’ 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경건 (敬虔)이라는 한자를 사용했는데 공경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조심하고 절제한다는 번역이 마땅하고 적절합니다. 27 절 마지막 구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에 대해 말씀하기까지 줄곧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연결하면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 나타날지를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이 여러 단어로 표현됩니다.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낳으셨다”(약 1:18)는 표현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할 때 사용하신 은혜의 통로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로우신 보혈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에서 쏟아지셨기에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의의 통로가 되었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가 거듭났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우리가 거듭납니다. 거듭난 새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역사하는 통로가 말씀입니다.

 

실패의 한복판에서 소망의 약속을

 

“여러분이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벧전 1:23).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면서 그것을 씨로 비유합니다. 썩지 않을 씨, 그 작은 씨앗이 심어지고 자라서 열매 맺듯이, 우리 안에 임한 새 생명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 그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마음에 심긴 말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마음에 심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 말씀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날 때 외부에서 우리의 마음에 말씀이 심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심겨졌다’ 는 표현은 구약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새 언약이 이루어진 성취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내가 내 율법을 그들의 생각 속에 주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3b). “그리고 내가 내 성령을 너희 안에 주어서 너희로 하여금 내 법령을 따르며 내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만들 것이다”(겔 36:27). 이 두 구절은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하는 기간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한 선지자들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로 붙잡혀간 그발 강가에서 이 말씀을 받았고, 예레미야는 멸망의 한복판 예루살렘에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동일한 맥락의 말씀입니다. 멸망의 한복 판에서 그들은 소망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역사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이 소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실패와 절망 가운데 처하게 된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돌판에 새겨진 말씀을 전해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겨서 준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이었기 때문에 안 된게 아닙니다. 어떤 민족이든 안 된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유대민족이 보여줬을 뿐입니다. 이 땅에 그 어떤 사람도 스스로 노력과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의 과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가 아니라 전 인류의 실패를 예를 들어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실패 한복판에서 소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마음에 말씀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고, 순종하는 능력을 성령님이 부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말씀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핵심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야고보서가 인간의 의를 강조하는 책이라는 오해를 불식시켜주는 핵심 단어입니다. 야고보뿐만 아니라 서신을 읽는 성도들이 이미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심긴 말씀은 옛 언약의 시대에는 절대로 쓸 수 없는 표현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속에 움직이는 말씀,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어서 마음을 사로잡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말씀이 마음에 심어진 체험을 한 사람들만이 이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영혼 구원하고, 자유롭게 하는‘말씀’

 

말씀을 ‘ 영혼을 구원하는 말씀’(1:21b)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자녀들의 마음에 새겨 주십니다. 기록해 주십니다.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는 게 구원이 아닙니다. 말씀을 마음에 기록해 주시고, 심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역사해 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말씀으로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을 우리 안에 내재하게 하시고, 기록하게 하셔서 말씀을 따라 살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 같지만,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 뒤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말씀이 움직여가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의 삶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 라 말씀이 내 안에서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선한 행위를 하면 구원받은 것 같고, 때로 시험과 유혹에 실패하면 구원을 못 받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행위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의 선함에 기인하거나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말씀이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성령님이 역사하게 하셔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의 의로움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에 심겨진 말씀이 존재하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죄악에 빠지고, 실패하고 유혹에 넘어지고, 방황할 때 ‘ 내가 진짜 구원받을 수 있나?’ 라고 의심합니다. 양심에 가책을 주고 회개하게 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런 갈등조차 없습니다. 마음속에 기록된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가책이 오고, 회개하게 하는 말씀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도의 견인’ 입니다. 우리가 참고 견디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말씀이 우리의 연약함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또 다르게 표현됩니다. 25절을 보면 말씀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씀을 이야기 하다가 ‘율법’ 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모세의 옛 언약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을 배려한 용어 선택입니다. 말씀(로고스)은 헬라문화에 익숙하지만, 율법(노모스)은 매우 유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야고보가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고, 말씀을 마음에 심어 주셨고, 마음에 심겨진 말씀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삶을 제한하고, 속박하고, 자유를 잃어버리게 한다고 오해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수록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진리의 말씀, 우리 마음에 새겨진 말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확신을 주는 말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씨앗으로 비유하고, 우리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셨습니다. 핵심은 씨앗과 땅의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네 가지 밭의 비유 등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는 세 단계를 보여줍니다. 첫째, 말씀의 씨앗을 소수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주시고 심어주시는 단계입니다. 둘째, 말씀이 심겨진 사람들을 통해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의 씨앗이 전파되고 심겨지는 단계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이 심겨지는 단계입니다. 셋째, 심겨진 씨앗이 자라서 열매 맺어 추수하는 단계입니다. 추수의 때는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때요, 심판의 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다른 사람에 게 전해지는 과정에 길가가 있고, 돌밭이 있고, 가시덤불이 있고, 좋은 땅이 있습니다. 길가는 단단해져서 씨앗이 들어가지 못하고, 돌 밭은 겉은 흙이지만 속에 돌이 있어서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가시덤불은 이 세상의 유혹과 탐욕에 막혀서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 는 마음입니다. 좋은 밭은 뿌려진 씨앗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마음에 어떤 영역은 길가와 같고, 어떤 영역은 돌밭과 같고, 어떤 영역은 좋은 밭같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좋은 밭으로 자라다가 어느 시기를 지나면서 가시덤불과 길가로 변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다양한 밭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밭을 끊임없이 기경하고, 말씀이 내 안에 올바로 임재해서 다른 이들에게 전파되는 통로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반드시 통과하는 것이 우리의 전인격입니다.

 

전인격을 통해 삶으로 나타나는‘말씀’

 

말씀이 전인격을 통해서 삶으로 나타나는데 전인격의 반응, 말씀에 대한 반응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체 기관을 예로 듭니다. 첫째, 귀를 통해서 말씀에 대한 경청을 강조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사람마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하며 노하기도 천천히 하십시오”(19절). ‘ 듣기를 빨리 하라’ 는 것은 귀가 얇아서 누가 뭐라 하면 여기저기 휩쓸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가감 없이, 제한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경청을 의미합니다. 귀가 분명 무엇인가 듣는데 영적인 귀가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빨리 듣는 것은 속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경청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입은 말씀에 반응하는 언어를 강조합니다. “만일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자기 혀를 제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경건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26절). 말하기를 천천히 하라는 것은 말의 속도를 느리게 하는 뜻이 아닙니다. 혀를 제어하라는 뜻입니다. 합당한 말, 적합한 말, 때에 맞는 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말, 진실한 말, 왜곡되지 않는 말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말이 나가려고 할 때 내 마음에 기록된 말씀이 그 말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더디게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합당한 말로 바꿔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말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혀를 제어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을 더디게 하라는 말은 단어 수를 적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장하는 언어가 되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말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말을 옮길 때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말을 할 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왜곡된 말을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전할 때 자기 생각을 덧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은 깨달은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듣기만 해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만일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자기의 생긴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거울을 보고 돌아서서는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금방 잊어버립니다”(22~24 절). 말씀을 영혼의 거울에 비유합니다. 말씀을 보고 깨닫는 사람은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바로 고쳐야 하는데 무엇인가 가로막는 기운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서 잘되지 않습니다. 결국 마음으로 문제가 귀결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 버리고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이 말씀은 능히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21절). 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 사람들이 듣고 보고 느끼는 것으로 마음이 변화될 것 같지만, 아무리 듣고 보고 깨달아도 마음에 있는 악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길가와 같이, 돌밭과 같이,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이 오감을 통제합니다. 그래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 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도 정반대의 결과를 내리는 이유입니다. 마음에 악과 더러운 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오감이 다르게 작동합니다. 마음에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끊어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삶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만 못 박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나의 옛사람이 못 박혀 죽어야 할 십자가입니다. 마음에 있는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는 유일한 통로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자들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성령님이 임하셔서 십자가에 우리 옛사람을 못 받고 승리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그리고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미 심어주신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순종하는 겸손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온유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100% 따르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온유함으로 말씀을 계속 받아야 합니다. 이미 심겨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을 때 우리가 성장합니다. 삶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환란 가운데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지키는 열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환난 가운데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환란과 시험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며, 우리에게 지혜와 은사를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분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합당한 자녀들의 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심겨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심겨진 말씀이 자라서 우리가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은사를 주십니다.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돕고, 자신을 지켜가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