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부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십시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차별하거나 편애하지 않습니다. 편견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이여,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회당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더기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시오’라고 말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판 아래 앉으시오’ 라고 말한다면 이는 여러분이 스스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을 따라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 아닙니까?”(1~4절). 야고보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부자는 환대하고, 가난한 사람은 홀대한다면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고 차별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세대나 부요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고, 지위가 낮은 사 람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차별이 많았습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로마 사람과 아닌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야고보가 목회했던 예루살렘교회도 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었고, 흩어진 유대인 중에도 차별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믿음을 가진 성도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외모로 차별하고, 편견과 선입견으로 차별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 자신이 가진 취향이나 기준으로 사람을 편애하거나 무시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차별받게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창조하셨고, 모든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이유가 있고, 존중받을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위, 소유와 업적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한데 그것으로 사람을 차별하면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거절하지 않으셨고,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고,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사회 약자에 속해 있던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적개심으로 공격했던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사두개인들, 헤롯당 원들조차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도 제한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제한하지 않고 차별하 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위나 업적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가질 수 없고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만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을 겉모습으로 차별하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존중해 주신 것처럼,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부요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직분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품고 존중하십시오.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둘째,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택해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부자들은 여러분을 학대하며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까? 그들은 여러분이 받은 아름다운 이름을 모독하지 않습니까?”(5~7절).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커지고, 깊어지고, 성숙하는 믿음의 부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택해서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더 부요하게 만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실패하고, 고난과 고통 속에 있을 때 믿음이 더 커지고 부요해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나님께 절박한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고 연약해졌을 때 불신앙이 믿음으로 나가는 것을 봅니다.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는 내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 11:30). “그러나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약한 것들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모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9~10).
사도 바울이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궁핍과 모욕과 핍박과 공공 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가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한 것도 자랑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들어서 믿음을 부요하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해서 지혜로운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약한 것을 택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 환경과 상황이 우리의 믿음을 부요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의 믿음이 가난할 때, 병들었을 때, 어려움과 고통과 풍랑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더 크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이 믿음이 더 좋고, 부요한 사람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병든 사람은 믿음이 많고 건강한 사람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하든 부요하든, 약하든 건강하든, 풍랑 가운데 있든 순풍에 돛단 듯 형통한 시간을 보내든 믿음이 부요해지기를, 믿음 가운데 승리할 수 있기를, 믿음이 더욱 성숙하고 성장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더 커지기를 바 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십시오”
셋째,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십시오”입니다. “여러분이 성경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상의 법을 지킨다면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며 율법이 여러분을 범죄자로 판정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어느 하나를 범하면 율법 전체를 범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고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비록 간음하지 않았더라도 살인했다면 율법을 어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의 율법으로 심판받을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 ”(8~13절). 야고보는 율법의 진정한 정신, 참율법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참된 정신입니다. 율법의 최상위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고, 십계명이고, 최상의 법 내용입니다. 최고의 법은 사랑입니다. 진정한 자유의 율법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인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는 사랑의 빚 외에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율법에 따라 우리는 범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자유의 율법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자유를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속죄하심으로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구원을 완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이 ‘ 네 이웃을 네 자신 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하신 한마디 말씀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갈 5:14).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율법을 완성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최상의 법이고, 자유하는 율법입니다. 긍휼이 심판을 이기는 은혜입니 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 가지로 이해합 니다. 첫째, 차별하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둘째,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셋째,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구원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말고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십시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조차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율법이 완성을 이루고, 자유하는 율법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부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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