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믿음의 사람은 농부처럼, 욥처럼 인내합니다.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참된 믿음은 참된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교훈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성도들이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인내하고, 기도하며 이길 것을 권면합니다.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핍박 가운데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흩어짐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려서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의한 이들과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하여 가난 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성도들에게 교훈이 주어졌습니다. 시험 가운데 인내와 기도를 강조하는 교훈입니다.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 같지만, 참된 믿음의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진리입니다.
야고보서 5장 7~12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오래 참음 가운데 기다리며 인내하라”는 교훈입니다. 13~20절까지는 “기도하라”는 교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인내와 기도에 관한 교훈이 거의 동일한 횟수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신앙은 기도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내를 통과하지 않고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시험을 만날 때 인내를 온전히 이루고, 온전한 인내를 이루기 위해서 기도로 나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로운 사람을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분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약 5:6). ‘ 대항하지 않았다’ 는 것은 불의한 방식 그대로 복수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의 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교훈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실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누군가 너의 왼뺨을 치거든 오른뺨도 대라.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가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한번의 연설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제자들의 마음에 새겨졌 , 여러 기록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지침으로 가르쳐졌습니다. 야고보서의 모든 교훈이 예수님의 산상수훈 교훈을 적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내와 예수님의 재림
악한 이들의 핍박과 시험 가운에 있는 당시 성도들이 어떻게 의로운 모습으로 대응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내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주께서 오실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땅의 열매를 참고 기다리며 이를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기까지 기다립니다”(7 절). 인내를 연약하고, 부정적인 모습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가득하지만 참고 삭이는 것을 인내라고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농부의 인내’라는 단어를 통해서 농부가 열매를 바라며 기다리는 긍정적인 인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인내가 아니라 농부가 열매를 넋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아내는 등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 비를 내리고, 햇빛을 기다리고, 좋은 날씨를 기다리는 것입니 다. 열매가 풍성히 맺힐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농부는 할 수 있는 것은 행하고, 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립니다. 열매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내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인내입니다.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인내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고난과 인내를 의미합니다. 예언자들도 할 말은 했습니다. 인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하기만 하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목소리는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방식, 악한 방식, 거짓된 방식, 폭력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당한 그대로 거짓과 속임수와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의 열매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영원히 누릴 기업의 열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농부가 열매를 기다리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지만, 열매를 거두는 추수는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땅과 농부, 씨를 뿌리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실 때 추수는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알곡은 거두고 가라지는 버리는 것입니다. 열매는 거두지만 열매가 아닌 것은 버려지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금은 추수를 기다리는 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두 번이나 예수님의 재림이 매우 임박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도 오래 참고 여러분의 마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주의 강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여,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서로 불평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십니다”(8~9절).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심판을 위해서 입니다. 왜 번거롭게 두 번이나 오시는 것일까요? 왜 초림과 재림이 있는 것일까요?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심판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라는 말씀이 그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끝내지 않고, 구원의 길을 여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은혜 받을 기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추수의 열매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선한 열매가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추수의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군가 여러분 가정의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문을 열고 맞이하든 거절하든 임박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습니다. 사도 야고보 시대에도 임박했고 지금도 임박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그때 이뤄지지 않았으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2천 년의 시간이 하나님의 영원에 비하면 한 점의 순간과 마찬가지일 뿐인 시간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힘들고 어렵고 귀찮은 이 시대에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거기에서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뒤엎는 재앙으로 주시는 메시지가 너무 분명합니다. 역사에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재림의 임박입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증상을 여러 가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기근에 대해 말씀하시고, 전염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지진이 전 세계 곳곳에서 빈도와 강도가 느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전 세계적인 전염병이 계속 출현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인간들이 자초한 것이지만, 예수님이 예언하신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녀가 부모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이웃을 죽이는 극도의 이기주의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자기를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말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지독한 자기중심적인 사랑, 모든 판단 기준이 자기가 되어버리는 것이 말세의 증상입니다. 이 모든 상황이 예수님의 재림의 임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추수의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우리가 종말을 맞이하는 임박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의 인내를 기억하라
인내의 의미를 더 깊이 설명하기 위해서 욥의 인내를 추가적으로 설명합니다. 농부는 열매라는 구체적인 것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인내를 가지고 있지만, 때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원인을 알 수 없고 결과도 알 수 없습니다. 끝을 모르는 고난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욥의 인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욥은 역사 속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사탄의 시험이었고, 공격이었고, 하나님이 허용하신 시험이었습니다. 욥은 세 단계 고난을 겪었습니다. 첫째, 하루아침에 모 든 것을 상실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자녀들과 소유 모든 것을 상실했습니다. 그때 욥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말에 욥은 벌떡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어 버리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내 어머니의 모태에서 벌거 벗고 나왔으니 떠날 때도 벌거벗고 갈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것을 여호와께서 가져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욥은 죄를 짓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욥 1:20~22). 욥은 놀라운 믿음으로 인내의 시험을 통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욥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온몸에 악성 종기가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 고난에서 욥의 아내가 무너집니다. 욥의 아내가 “이래도 당신이 순전함을 지킨단 말이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욥의 아내의 믿음이 무너졌고, 인내가 무너졌습니다. 욥은 아내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내에게 대답했습니다. ‘ 정말 어리석은 여자처럼 말하는군. 그래, 우리가 하나님께 좋은 것만 받고 고난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요?’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입술로 죄 짓지 않았습니다”(욥 2:10). 놀라운 욥의 인내입니다. 아내가 무너진 상황에서 욥은 입술을 굳게 닫고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주어진 고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단계의 시험은 그 상황이 끝을 모르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가장 힘든 시험입니다. 짧은 고난으로 끝나는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인내 자체를 시험하는 시험이었습니다. 끝을 모르는 어두운 터널이 계속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때 욥을 위로하려고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위로한다고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욥의 문제를 분석하려 했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권면했지만 욥에게 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대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쌓여있던 원통함, 불평, 원망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욥기가 길어졌습니다. 욥이 친구들의 많은 말에 대응하면서 쏟아나오는 한탄도 인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떠나서 원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면서 그 원인을 알고자 했고,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며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회복시켜 주신 것은 그가 시험을 통과했다고 합격증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은 인내했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 시험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토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쓴 뿌리, 아픔, 원통함, 이해하지 못해서 원망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기도하면 우리의 인내를 인정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을 기도로 가지고 나간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인내라고 받아주십니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포장하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잘 믿는 척하는 것은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욥의 인내가 소중합니다. 갑작스럽게 닥친 고난 앞에서는 우리가 인내할 수 있지만, 오랜 시간 시험 앞에서 우리는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욥의 인내를 기억해야 합니다.
의로운 사람의 모습 ‘기도’
욥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처럼 의로운 사람의 두 번째 모습은 기도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으면 찬송하십시오”(13절). 야고보 사도의 별명이 있었습니다. 낙타 무릎입니다.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기도했기에 무릎에 못이 박힌 것이 마치 낙타의 무릎과 같다고 해서 생긴 별명입니다. 참된 믿음과 행함으로 살아간다고 할 때 야고보 사도가 가장 강조했던 행함이 기도입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드려진 기도입니다. 14절 이하에서 세 가지 상황에서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첫째, 질병으로 고통 받을 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십시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14~16절). ‘기름을 붓는다’ 는 것은 성령님의 임재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당시 의학적인 치료입니다. 당시에는 의술이 발전하지 않아서 의사라는 직업이 보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술적이고 우상 숭배 같은 제의적인 방법으로 치료할 때 ‘기름을 붓는다’고 했습니다. 실제적인 치료를 의미합니다. 다양한 기름이 치료할 때 쓰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기름을 살 돈이 없다면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들을 통해 지원해 주고, 기름을 발라주고, 함께 믿음으로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치료비가 부족한 성도들을 위해서 공동체에서 마음을 모아 지원해 주고, 기도해주는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습입니다. 여러분, 죄와 관련 없이 걸리는 질병도 있지만, 자신의 죄로 인해 생기는 질병도 있습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좋지 않은 습관으로 인한 질병도 있습니다. 지나친 염려, 근심, 마음의 분노, 용서하지 못한 쓴 뿌리들이 건강을 해치는 질병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분노 때문에, 지나친 염려와 근심 때문에 “너희 짐을 주께 맡기라” 했는데도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짊어지고 있어서 생기는 질병도 있습니다. 우리의 불신 때문에 생기는 육체의 질병이 있을 수 있습 니다. 그때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나눔으로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공동체가 해주는 일입니다. 자신의 삶에 고치지 않은 습관으로 인해 생겨난 질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죄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도할 때 우리 삶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기근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이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본성이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3년 반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냈습니다”(17~18절). 기근은 경제적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때로 기근을 주시는 이유는 경제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고, 공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알이라는 신이 자신들에게 풍요를 준다고 믿고 섬겼습니다. 제사장도 만들고, 신전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3년 동안 비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비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때로 기근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3년 간 기근을 통해서 진정으로 비를 주시는 분이 바알인지 하나님인지를 엘리야를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다시 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과 축복의 풍요로움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기도 부탁을 하고,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 줄 때 하나님 축복의 단비가 내릴 것입니다. 셋째, 유혹에 빠져 진리를 떠난 형제가 있을 때입니다. “내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 유혹을 받아 진리에서 떠난 사람을 누가 돌아서게 하면 여러분은 아십시오. 죄인을 유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한 사람은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고 많은 죄를 덮을 것입니다”(19~20절). 진리에서 떠난 형제가 있을 때 그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질병이나 기근이라는 상황에서는 하나님 이 자연과 생명을 주관하시기에 즉각적인 응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영혼은 타락한 자유 의지가 있어서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인내 가운데 진리에서 떠난 영혼을 돌이키기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결론은 인내 가운데 기도를 강조합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시험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바라보기에 농부처럼, 욥처럼 인내합니다. 질병이나 경제적 기근, 진리에서 떠난 이들을 돌이키기 위해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내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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