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 (시편 16:1~11)

새벽지기1 2022. 5. 3. 06:47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이 우리의 특권이요, 의무요, 하늘의 은혜입니다.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며 날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주 주일이 부활주일이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삶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고난과 시련도 무너뜨릴 수 없는 하늘에 속한 즐거움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즐거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대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그분의 완전하신 기쁨 가운데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그 기쁨을 나눠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러 차례 “나의 기쁨을 너희들에게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그러나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 충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13).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시 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님 안에 있었던 영원한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허랑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아들을 보고 달려가 입을 맞추고,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고,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아버지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잔치에 초대해서 함께 즐거워하는 아버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회개한 이들을 다시 품에 안으시고 즐거워하시는 아버지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즐거움과 기쁨을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대리자로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통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손이 부족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해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즐거움을 우리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비유가 ‘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 입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기고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했습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수십 년 연봉입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평생 벌지 못하는 액수의 가치를 맡겼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소중한 삶, 소명, 인생의 가치를 의미합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해 무엇인가 남겼습니다. 주인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칭찬에 몰두한 나머지 뒤의 메시지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주인이 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파묻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을 잃어버리면 주인이 벌할까봐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그 주인은 무엇인가 노력 하다 손실이 있어도 책망할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했는지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렸는지가 아 닙니다. 하나님의 즐거움에 얼마나 참여했는지가 인생의 목적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조는 사람의 제일 되는 의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 입니다. C.S.루 이스는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라고 명령하시며, 우리가 그분을 즐거워하도록 초청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즐거워할 때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다윗의 믿음이 그런 믿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즐거워했습니다. 그가 남긴 시편의 고백들은 도망 다닐 때, 죽음의 위협 속에 있을 때, 오해가 있을 때, 핍박 속에 있을 때 마음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가장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시 9:2).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음이 정직한 너희 모든 사람들아, 기뻐 외치라!”(시 32:11). 자신이 하나님을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라고 도전했던 이유는 이 땅에서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외해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로만 있기를 원하실까요?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구속받고,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한 사람들은 그분을 경외하는 동시에 친밀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나아가셨던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을 즐거워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특권임과 동시에 의무입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의무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지 않다면 올바른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끊어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되는 행복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인생의 고난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되는 것이 행복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되는 것이 곧 행복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께 고백합니다. ‘주는 내 주시니 주를 떠나서는 어디에도 내 행복이 없습니다’”(2절). ‘ 주를 떠나서는 어디에도 내 행복이 없습니다’ 는 표현은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되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소유가 된 사람들은 마음이 기쁩니다. 갈등이 없습니다. 원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나치게 행복할까 봐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위로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비참하게 무너지게 만드는 죄악의 사슬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갈등이 없습니다. “다른 신을 좇는 사람들은 더욱 근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우상들에게 피의 잔을 바치지 않고 그 이름들도 내 입술에 올리지 않 을 것입니다”(4절). ‘ 하나님만이 나의 주시며, 나는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저 없이 행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어떤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굳은 의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영혼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되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은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내 기쁨입니다” (3절). 다윗은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바로 왕위로 가지 않았습니다. 사울이라는 악한 왕을 통해서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 있었습니다. 그 기간 다윗은 그 시대 억울하고 비참하게 여겨지는 모든 사람의 애환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그 땅에서 가장 억울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친구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성도들은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내 기쁨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들과 교제하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인지 모른다면 신앙생활 을 돌아봐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내 재산이시며 내가 마실 잔이시니 주께서 내가 받을 몫을 지켜 주십니다. 내게 주신 땅은 아름다운 곳에 있으니 내가 정말 좋은 곳을 내 몫으로 받았습니다” (5~6절). 이 순서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몫이 아름답고 좋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분깃이 아름답고 좋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몫이 어떻든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축복 속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몫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자신의 재산으로 여기는 사람은 “내게 주신 땅이 아름답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청교도 윌리엄 로는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이란 비어있는 황금잔을 가지고 갈증을 없애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어있는 황금잔을 가지고 아무리 마셔 봐야 목마를 뿐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은 것을 가져도, 넓은 땅을 가져도 아름답다는 고백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주신 그곳이 아름답고 좋은 곳입니다”라는 감사의 고백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사는 것이 안전한 삶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셔 둡니다. 주께서 내 오른 쪽에 계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뛸 듯이 즐거워하며 내 몸도 안전할 것입니다” (8~9절). 다윗의 삶의 목표는 항상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코람데오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앞에 모신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조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동적으로는 하나님이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고, 능동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자꾸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나아가도 귀기울여 주시는 분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내가 언제든지 쉬지 않고 귀 기울여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든지, 어떤 내용이든지 하나님 앞에 나가면 귀를 기울여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내게 조언해 주시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앞이 캄캄할 때도 내 속에서 갈 길을 알려 주시니”(7절). 나의 하루 인생이 하나님 앞에 사는 인생이었는지를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이 아닐 때 우리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후회가 남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인생을 살았다’ 고 고백할 수 있다면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주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일과를 마치며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지 돌이켜보고,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는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도 하나님 앞에 살게 하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삶이 있음을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영원한 생명의 삶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의 거룩한 분께서 썩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리니 주 앞에서는 기쁨이 항상 넘칠 것이요, 주의 오른손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10~11절). 다윗은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성령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았습 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눈을 뜨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을 직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서는 사람만이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십자가 부활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생명에 맴돕니다. 그래서 윤회한다고 생 각하고, 영혼이 떠돈다고 생각하고, 죽은 사람이 죽지 않은 것처럼 수년 동안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세계관이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이 땅에서 몇십 년 살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즐거울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 그 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더 크신 분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8~29).

 

여러분, 영원한 생명을 믿으십니까? 영혼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육신을 덧입혀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거듭난 영혼으로 새로운 육신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미국 하버드대학교 사회학자 엘론 렝어가 ‘마음의 시계’ 라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EBS에서 ‘황혼의 반란’ 이라는 이름으로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을 수십 년 전 환경으로 돌아가게 해서 몸과 생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는 실험입니다. 합숙소에 입소하기 전에 건강을 점검하고, 일정 기간 몇십 년 전 환경으로만 살아가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건강을 점검했더니 다들 좋아졌습니다. 사실 이 실험은 최면입니다. 가짜입니다. 입소하기 전에는 혼자 계단을 못 오르는 어르신이 있었습니다. 걸을 때 직선으로 걷지 못하고 방향감각이 흐트러지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고 다시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마음의 시계가 몸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사실 과거를 돌이키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돌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죽음을 넘어서 우리가 믿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그 환경으로 간다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거로 돌리는 것은 가짜지만, 이것은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믿음으로 오늘을 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죽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죽음을 넘어선 생명으로 이 땅에서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움과 고난이 있습니까? 스스로 영원히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을 앞으로 당겨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활의 생명과 믿음으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 라”(히 12:2).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즐거움 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즐거움, 우리에게 나누어줄 즐거움, 부활의 생명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주어지는 즐거움을 바라보시며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즐거움이 있다면 십자가와 같은 고통도 이길 수 있습니다. 수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 속에 믿음으로 승리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며 승리했습니다. 하나 님 앞에 사는 즐거움이 우리의 특권이요, 의무요, 하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믿음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