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목표가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면
가장 불행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셔서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는 것’ 입니다. 가정의 목표가 나의 행복이 될 때 행복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의 목표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될 때 행복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일이 없는데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의 본능적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만이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을 통해 우리의 허물과 약점이 나타납니다. 결점과 부족함이 드러납니다. 가정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인지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게 됩니다. 그때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가정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셨습니다. 고멜의 계속되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버리지 않고 계속 아내로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멜이 호세아를 배신할지라도 호세아는 고멜을 포기하지 않고 변함 없이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를 통해서 끊임없이 배반하는 인간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줍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여호와를 알기 위해 전심전력하자 ”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변함없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를 은혜로 용서하는 사랑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찢으셨지만 우리를 고쳐 주실 것이다. 그가 때리셨지만 우리를 싸매주실 것이다. 이틀이 지나면 그가 우리를 살리실 것이다. 3일째에 그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우리가 그 앞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알기 위해 전심전력하자. 그가 오시는 것은 새벽이 오는 것처럼 분명하다. 그는 마치 비처럼, 마치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1~3절). 가정의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가정의 회복은 사랑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때 가정이 다시 살아납니다. 어떤 가정의 고통도 끊임없이 자신을 떠나고 배신하고 음란한 생활을 하는 아내를 포기하지 않아야하는 호세아의 고통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호세아의 모든 고통도 하나님의 고통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구약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헤세드’ 입니다. 250번 정도 사용됐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 헤세드’ 를 다양하게 번역합니다. ‘사랑’ 이라고 번역하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 깊고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인자’ , ‘인애’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요, 변하지 않는 사랑이요,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로마서 8장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가 바로 그 사랑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헤세드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헤세드는 첫째, 허물과 죄를 은혜로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할까?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할까? 너희 인애는 아침 구름과 같고 금방 사라지는 새벽이슬과 같다 ’”(4절). 하나님의 질문에 하나님의 고통이 나타나 있습니다. 쉽게 사라지고 변질하는 사랑을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때로 사람들이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스러울까봐 그렇 습니다. 하나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배신하는 인간들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알기 위해 전심전력하자. 그가 오시는 것은 새벽이 오는 것처럼 분명하다. 그는 마치 비처럼, 마치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3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새벽빛처럼 일정하시고, 봄비처럼 변함없이 임하십니다. 우리의 불신과 배신과 신실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고통을 담당하시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한없는 용서와 은혜로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처리하심으로 그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자에게 변함없는 사랑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까닭은 그 대상이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죄와 허물을 바라보며 사랑스럽지 않으면 사랑이 사라져 버립니다. 때로 분노가 일어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지, “하나님은 진노이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 진노하시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헤세드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매일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일정하게 온다는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아침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몰아내시고, 그분이 허락하시는 빛으로 우리를 비춰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비추는 태양 빛이 우리를 용서하 심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을 살리는 것은 헤세드의 사랑입니다. 매일 새벽빛처럼 임하시는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임해야 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고 감사하는 사랑
둘째, 헤세드는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고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가족 간에 일어나는 대부분 갈등은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나의 모습처럼 바꾸려고 한다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다르게 창조하셨고, 서로 다른 것을 기뻐하시고, 서로 다름을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가족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명히 깨닫습니다. 그리고 인정합니다. 인정하기까지 어떤 사람은 짧은 시간이 걸리지만, 어떤 사람은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그 차이를 처음에는 알지 못해서 힘들어하고, 그 차이를 알아도 받아들일지 말지 망설이다가 시간을 보냅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완전히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차이는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가족 간의 차이에 감사하고 존중하는 게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셨고, 서로의 차이를 보면서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것이 불편하지만, 하나님은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가정은 서로 다르게 창조된 이들이 서로의 차이를 감사하고, 존중하는 영적인 훈련장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에 행복과 만족을 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안전감(security)’ 과 ‘중요감(significance)’ 입니다. 안전감이란 내가 사랑받고 있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고, 중요감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가정 안에서 안정감과 중요감을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두 가지가 파괴됩니다. 가장 먼저 부모가 자녀의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녀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정감과 중요감이 심각하게 파괴됩니다. 그때 그 가정이 불완전하고, 자녀에게 큰 아픔을 주는 공동체가 됩니다. 가정에서 안전감과 중요감을 느끼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통해서,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을 통해서 스스로 얼마나 중요한지, 자기가 하나님께 얼마나 받아들여지는 존재인지를 깨달으면 가족 구성원들에게 그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헤세드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언약에 신실하게 헌신하는 사랑
셋째, 헤세드는 언약에 신실하게 헌신하는 사랑입니다.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가장 심오한 언약 위에 세워집니다. 오직 피조물 중에 사람만이 언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언약을 지킬 때 가장 자유롭습니다. 때로 부부간에 언약을 깨뜨리고 금지된 일을 행할 때 경험하는 어떤 스릴이나 욕구를 사랑으로 착각하는데 그것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때 가장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이 호세아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간 고 멜을 “다시 데려오라,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고멜은 신실하지 못했을지라도 호세아는 언약을 맺은 관계이기 때문에 신실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에게 일방적으로 언약에 신실한 헤세드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너와 영원히 혼약을 맺고 내가 의로움과 정의로 또 인애와 긍휼로 혼약을 맺을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해 진실로 혼약을 맺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호 2:19~20). 하나님은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심으로 우리에게 헌신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배반하고, 신실하지 못한 우리의 죄의 대가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행하지 못한 인간이 모든 저주를 스스로 담당하게 함으로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고, 신실한 언약적 사랑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가정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명한 작가 헨리 클라우드 박사의 말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 사람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이기적인 필요와 갈망보다 다른 사람을 더 우선시하는 것이다. 희생하고, 나눠주고, 고통받는 것이다. 오랫동안 언약을 지키기 위해 상처와 폭풍우를 견뎌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을 깨달으면…
“사랑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킨다”고 말하는데 틀린 말입니다. 그 언약을 지키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정을 지탱하고, 가정 안에 사랑을 가져오는 것은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언약에 신실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언약을 지키기 때문에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깊이 경험하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 안에 거한 인물을 꼽으라면 ‘잔느 귀용’ 이라는 여성입니다. 잔느 귀용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게 된 이유는 시댁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잔느 귀용은 프랑스 루이 14세 시절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잔느 귀용은 어머니에게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났습니다. 외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어떤 이유인지 잔느 귀용을 22살 연상 사업가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잔느 귀용과 아무 상의도 없이 의도하지 않은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식 며칠 전까지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도착한 시댁은 그녀의 초상집과 같았습니다. 정중함과 예의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정이었습니다. 특히 시어머니는 매사에 잔느 귀용의 결점을 들춰내고, 친정을 비난하고, 친정 부모에 대해서 모욕적인 말을 했습 니다. 시어머니가 “너는 누군가에 의해 바꿔치기 된 아기였을거야. 너희 부모님이나 형제들과 전혀 다른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네 마음속에는 분명히 악한 영이 들어 있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또 이런 말을 하며 저주했습니다. “네가 이 집에 오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 네가 온 후부터 집안이 점점 불행해지고 있단 말이야.” 남편은 아내를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어떤 고통을 받는지를 알면서도 남편 역시 그녀를 아주 난폭하게 대했습니다. 심지어 시어머니의 하녀를 며느리에게 붙여 놓고 감시하게 했습니다. 하녀마저 그녀를 무시하고 반항하고 괴롭혔습니다. 시어머니의 말만 듣는 하녀였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몸이 아파 병간호를 해야 했습니다. 남편의 병간호, 시어머니의 핍박, 하녀의 괴롭힘이 잔느 귀용을 매일매일 죽고 싶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잔느 귀용이 천연두에 걸려서 거의 죽어갈 때도 시어머니는 치료도 안 하고 방치했습니다. 의사가 그 모습을 보고 시어머니를 야단칠 정도였습니다. 잔느 귀용이 어느 날 친정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가 소개해준 수도사를 만납니다. 성프란시스코회 수도사를 만나고 그 수도사를 통해서 아가서 1장 3절 말씀을 받습니다. “네 이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부어놓은 향수 같다”는 말씀 속에서 잔느 귀용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 말씀 앞에 임하시 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댁에서 받은 모든 상처가 순간적으 로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밤새 잠 못 이룰 정도로 하 나님의 사랑에 깊이 잠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남겼 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달콤한 기름처럼 제게 흘러넘쳐 남은 나의 모든 자아를 다 태우는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잔느 귀용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시댁 사람들의 부당한 대우와 핍박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겨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헤세드 사랑으로 승리했습니다. 남편의 병 수발드는 것을 단순히 남편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여기며 기쁘게 했습니다. 엄청난 시어머니의 핍박과 저주가 있었지만, 엄청난 내적인 자유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고통이 클수록 하나님의 깊은 헤세드의 사랑이 그녀에게 충만했습니다. 잔느 귀용이 쓴 많은 글은 고통 속에서 진주처럼 빚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잔느 귀용은 28살에 남편과 사별합니다. 잔느 귀용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할 것을 서원하고, 70세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는 글을 남기고, 강연을 했습니다. 기도해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잔느 귀용은 헤세드 사랑으로 최악의 가정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 안에 깊이 거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잔느 귀용과 같은 고통에 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헤세드 사랑만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의 죄와 허물을 은혜로 용서하는 사랑,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는 사랑, 약속의 언약에 신실한 사랑,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변함없는 사랑,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사랑이 우리 가정에 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됩니다. 가정의 목표가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행복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가정의 목표가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면 가장 불행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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