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문학비평가인 C. 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 anity>라는 책의 1부를 통해 차별금지법의 문제점을 지적해보고자 합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BBC 라디오 방송으로 나왔습니다. 전쟁이 한창인데 이러한 내용이 아주 진지하게 방송되었다는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책은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책에서 말하 고 있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살아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무참히 죽어갔습니다. 그런 시대의 가장 중요한 위기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다’는 도덕의 붕괴였습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위기보다 두려운 위기는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1장에서 그는 이러한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옳고 그름, 그것이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다.’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한 가지 단어가 있다면 옳고 그름이라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옳고 그름의 문제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시대 사사 시대가 그랬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내가 보기에 옳으면 옳은 것입니다.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것이 구약의 사사 시대였고,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무너지는 그 시대의 문제였고, 또 오늘 이 시대의 문제입니다.
“옳고 그름을 규정하는 법이 있다”
루이스가 말하는 핵심은 “옳고 그름을 규정 하는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 본성의 법칙입니다. 자연법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 과학 법칙과는 다른 자연법으로, 도덕 법칙, 인간 본성의 법칙, 혹은 덕률이라는 말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 옳고 그름이 우리와 우주에 대하여 명확하게 생각하는 토대입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싸우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법칙 혹은 도덕 법칙은 집단 본능일까요? 루이스는 이것이 본능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도덕률이 우리가 연주해야 할 곡이라면, 본능은 그 악보를 연주하는 키와 같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떤 키를 눌러야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도덕 법칙이라면, 그 키와 같은 것은 우리의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성의 법칙은 인간 안에 있는 여러 본능을 조화롭게 해서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 자체로 집단 본능이 아니라는 것입니 다. 그렇다면 인간 본성의 법칙은 교육을 통해 주입된 사회적 관습일까요? 루이스는 그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시대, 어떤 나라들의 도덕관을 비교해보면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이 있으며, 실상 어느 시대건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건 도덕적인 원칙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단 어떤 도덕이 더 우수하고 열등한가 판단하는 기준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인간 본성의 법칙이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 본성의 법칙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교육으로 주입할 수 있는 관습도 아니며, 우리가 만들어 내지 않았으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본성의 법칙은 우리가 만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실재하고 있는, 벗어날 수 없는 법칙입니다.
이 법칙의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요? 루이스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유물론적 관점’이 있습니다. 유물론적 관점은 “이 물질과 공간의 모든 것은 우연히 생긴 것이므로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는 질문할 필요가 없고 또 알 수도 없다, 많은 우연을 통해서 몇몇 물질들이 인간으로 진화하고 발전한 것뿐”이라고 봅니다. 또 다른 관점은 ‘종교적 관점’ 입니다. “우주의 배후에는 정신과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지각과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선호하는 존재로, 우리가 때로는 모르는 목적을 위해, 때로는 자신과 같은 존재를 만들려는 목적을 위해서 우주를 만든 거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종교적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신뢰하고 좋아하는 과학으로는 이 두 관점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알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설명 할 수 있을 뿐이지,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진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과학으로는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난감한 상황에서 과학적 관찰이나 실험으로는 알 수 없는 내용까지 속속들이 다 알 수 있는 대상이 전 우주에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 본성의 법칙 아래 존재”
이렇게 정리해볼까요? 우리는 인간 본성의 법칙 아래 존재합니다. 이 법칙은 우리를 제어하는 법칙이며, 억누르는 법칙이고, 때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법칙입니다. 그러나 그 법칙은 잘 따르는 이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법칙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기고 있는 법칙,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그 누군가와 또 그 무엇인가의 법칙입니다. 우주를 지휘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 무언가는 내 안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그릇된 일에는 책임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법칙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이 배후에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만드신 도덕률, 인간 본성의 법칙을 어기는 행동을 만일 그 만드신 분이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선한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만일 절대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이 모순, 죄악, 이 법칙에 어긋나는 우리의 모든 것은 대부분 미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원형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루이스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보이는 모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그분의 법칙 아래 우리가 존재한다고 설명합 니다. 우리는, 인간은, 이 인간 본성의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게 돼 있습니다. 때로 어떤 분은 성경에 진노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두고, “어떻게 선한 분이 진노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선한 분이기 때문에 진노하십니다. 진노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심판하시기에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만일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있습니다.
“이 우주를 다스리는 분이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다.”
우리가 믿는 그분이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 우주를 다스리고 있다면, 우리가 그분의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의 원수가 되는 상황이므로 우리에게 또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 우주를 다스리기에 우리에게 소 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설 명하는 것이 <순전한 기독교> 1장의 논리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입니다. 왜? 그분이 가장 선하신 분이기에, 절대선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그 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동맹자이지만, 동시에 그분의 원수가 되었기에 우리는 그 존재를 피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깨닫기 전까지 기독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병들었다는 것을 알 때야 비로소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 가망도 없는 처지에 있다는 점을 깨달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가난한 자의 복을 설명하십니다. 가난은 스스로 병들었다는 것을 깨닫는 가난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이 절대적인 선의 법칙, 인간 본성의 법칙, 도덕 법칙을 부여하신 그분을 만나기가 두렵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 절대적인 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우리의 모순을 가지고는 그분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피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절대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인간 본성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자들은 위안이 되지만, 그것을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은 최고의 공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차별금지법의 핵심은 제3의 성 혹은 사회적 성이라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실체인 것처럼 만든 것입니다. 남자 여자 외 에 제3의 성을 규정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에 포함돼 있습니다. 이제 저는 차별금지법의 문제에 루이스가 말한 ‘인간 본성의 법칙’을 적용하고자 합니다. 많은 경우 동성애자들이 느끼는 불안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차별 때문에 불안하다.”, “내 안에 있는 동성애의 성향을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차별하고 혐오하고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들이 차별금지법 제정 목적이라고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옳고 그름이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루이스는 “옳고 그름이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인간 본성의 법칙 아래 살고 있고, 인간이 싸우고 불안하고 갈등을 빚는 원인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만 그런 건 아닙니다. 왜곡된 모든 성적 탐욕이나 또 잘못된 거짓, 음란, 모든 종류의 죄악들, 교만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선에서 벗어난, 인간 본성 의 법칙에 벗어난 모든 경우는 다 그렇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사람들의 차별 때문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제3의 성이라는 주장은 심지어 자연 과학 법칙에도 위배됩니다. 의학적으로 남자와 여자 외에 제3의 염색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없는 것입니다. 성향과 실제 염색체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에서 이것은 그른 것입니다. 회색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에서 옳음을 택하면 평안이 옵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평안이 옵니다. 그름을 택하면 우리 마음속엔 불안이 찾아오고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옳은 길을 가고 있으면 많은 사람이 오해해도 마음에 평안이 오고 오히려 더 당당해집니다. 그러나 옳지 않은 길을 가고 있으면 많은 사람이 지지해줘도 불안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모든 우주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라는 그 루이스의 말이 사실이며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차별금지법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도덕률 혹은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루이스의 관점으로 볼 때 도덕률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형법으로 강제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매우 심각한 모순입니다.
몇 개월 전 한 지상파 방송에서 어느 중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저녁 뉴스로 보도했습니다. 한 학생이 커밍아웃을 한 이후 친구들이 왕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갔다 오면 책상이 무너져 있고 또 친구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자신을 따돌린다는 호소를 전한 뒤 그 기자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중학생은 아직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름 갖고도 친구를 따돌릴 수 있고 부모의 직업, 얼굴 생김새 온갖 이유를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서로를 따돌리는 그런 나이입니다. 커밍아웃한 자신을 따돌렸다는 이유로 친구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게 맞는 일일까요? 어떠한 이유로든 친구를 왕따시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는 인간 본성의 법칙, 마땅히 가져야 할 도덕률을 교육하고 스스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 줘야 할 일을 범법자로 만들어 처벌하는 그러한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시도조차 불필요한 법이다
법의 정신은 도덕의 최대화입니다. 왜 법을 만듭니까? 도덕적 사회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범법자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 옳고 그름이 분별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법의 정신입니다. 법을 최대화한다고 도덕률이 대체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이 감당해야 할 것을 법으로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인간 안에 내재 된 인간 본성의 법칙은 법전이 없어도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내재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법칙을 지키면 그 자체가 평안한 것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큰 불안을 줍니다. 어떠한 성향과 충동을 통해 그러한 자극이 요구될 수는 있을지라도, 그러한 것들을 끊고 본성에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평안을 누리고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도덕이고,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인간 본성의 법칙, 이 도덕률을 최대화하는 것이 진정한 차별과 불안을 없애는 최선의 행복한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길입니다. 불필요한 법을, 오히려 부작용이 심한 법을 만들어서 도리어 도덕률을 무너뜨리는 법 제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을 제정하는 노력을 도덕률을 함양하고, 올바른 창조질서를 가르치는 데로 돌리기 원합니다.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을 따를 때만,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킬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도조차 할 필요가 없는 불필요한 법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별금지법과 같은 종류의 법이 통과된 유럽과 북미 또 일부 나라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본다면 결코 행복한 세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지 않는 나라가 됨으로써, 종말을 향하여 나아갈 때 구원받는 백성들이 살기 어려운 것뿐 아니라 사람들이 구원 얻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런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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