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예수 부활, 우리의 소망 (베드로전서 1:3~9)

새벽지기1 2022. 4. 23. 22:42

“예수님의 부활로 하늘에 썩지 않는 유업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얻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을지라도 더 깊이 사랑해야합니다.”

 

전염병과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고, 고통받는 이때 맞이하는 부활 주일은 이전보다 더 소중합니다. 고통받는 세상에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인지, 얼마나 짧은 인생인지, 얼마나 불확실한 인생 인지를 깨닫습니다. 절망스럽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불안과 절망을 이기는 유일한 길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국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님의 아들 매튜가 오랜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앓다가 스물일곱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비극을 겪은 지 1년 후에 릭 워렌 목사님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동안 아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이겨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답은 부활절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부활은 사흘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금요일은 고통의 날이었습니다. 토요일은 의심과 혼란, 그리고 비통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 주일은 소망과 기쁨, 그리고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평생 이 세가지 날을 수없이 경험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던졌던 근본적인 세가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 고통의 날에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의심과 혼란, 비통의 날을 어떻게 견뎌 낼까?’ 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어떻게 기쁨과 승리의 날에 이를 것인가?’ 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부활절입니다. 답은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에 소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가르켜 ‘살아있는 소망’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소망에 관해서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 앞에서 그는 실패했고 절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소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 모든 주제와 그들이 세상에 전한 모든 소식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세상에 소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소망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로부터 살리시어 산 소망을 얻게 하심으로”(3절). 3절은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찾아온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들에게 살아있는 소망이 왔음을 고백했습니다. ‘살아있는 소망’ 이라고 표현한 것은 막연히 기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소망입니다. 살아있는 소망의 반대말은 맹목적인 소망입니다. 그것은 곧 죽은 소망입니다. 살아있는 소망이란 과거의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현재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과거에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살아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미래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과연 우리에게도 살아있는 소망이 되고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반응이 있어야 하는가? 베드로가 고백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백했던 살아있는 소망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그것을 확인하는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하늘에 썩지 않는 유업이 약속되었다

 

첫째, 하늘에 썩지 않는 유업이 약속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얻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4~5절).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늘의 유업이 예비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을 때 땅을 분배해주셨습니 다. 미래에 정복해야 할 것이지만 미리 약속하심으로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시는 일 중의 하나는 ‘하늘에 우리의 집을 마련 하시는 것’ 입니다. 하늘에 우리에게 예비 된 유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읽는 당시 성도들은 엄청난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오늘날 터키의 ‘갑바도기아’라는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많은 동굴과 지하 도시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숨어서 믿음생활을 했던 바로 그 지역입니다. 동굴과 지하에 오랫동안 살면서도 그들이 살아있는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는 소망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하 대피소에 숨어서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과연 소망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얻는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그들에게 과연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땅에 속한 유업이 아닌 하늘에 썩지 않는 유업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소망이 살아있습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핍박과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지하동굴에 숨어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소망은 살아있습니다. 하늘에 예비된 유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 게 예비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알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가 여러분의 마음눈을 밝게 하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힘의 능력의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권능이 어떠한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엡 1:18~19). 우리 마음의 눈을 밝게 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유업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이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얻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바라보게 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얻을 칭찬 과 영광과 존귀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온갖 시험을 당해 잠시 근심하게 됐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당하는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해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6~7절). 베드로전서를 읽는 성도들은 시험 가운데 있었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로 단련 되는 것 같은 믿음의 시련이었습니다. 가난과 핍박 속에 있는 그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이 살아있는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현재 시험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리스도가 나 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영혼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고, 세상 전체를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사건의 시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위해 하늘의 유업과 하늘에 영원한 집을 마련하시고, 동시에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패전 세력들을 완전히 정복하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다시 구속하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세상의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때는 그분이 모든 권력과 권세와 권능을 멸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다스리셔야 합니다”(고전 15:24~25). 세상의 마지막, 곧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때가 올 것인데 모든 세상의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이 세상을 하나님 아버지께 바쳐 드릴 것입니다. 그때는 이 땅에서 시험과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성도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것을 바라봅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시험이 클수록 더 큰 영광과 존귀함이 됩니다. 이 영광과 존귀를 바라보는 믿음 속에서 기쁨이 샘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어느 수역에 가보면 표면의 해류 방향과 깊은 곳의 해류가 정반대로 흐른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세상의 파도가 휩쓸려 와서 우리가 끌려가는 거 같지만, 성도들에게는 바다 깊은 곳에 물줄기가 정반대로 흐를 수 있듯이 이 땅의 모든 게 끊어질지라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쁨의 물줄기가 흐릅니다. 우리에게 예비된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을지라도

 

셋째, 살아있는 소망의 증거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을지라도 더욱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으나 사랑합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로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8~9절). 베드로는 이 서신을 읽는 성도들과 자신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한 제자요, 수제자라고 일컫는 핵심 리더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교훈을 귀 로 듣고, 눈으로 기적을 보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 앞에서 도망했고 예수님을 부인했고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의 교훈을 직접 듣지도 못했고, 예수님의 기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들이 자신이 받은 시험과 핍박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가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으나 사랑합니다. 보지 못했으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강력한 확신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가능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눈으로 보는 신앙보다 중요한 것은 찬양 ‘ 도마의 고백’ 처럼 보지 않고 믿는 부활의 예수님이 영으로 임재하 시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니면서 전도하시면 전도집회를 할 필요가 없고, 믿으라고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끔 나타나신 것으로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죽인다고 달려드는 이들이 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으로 보고, 꼭 만져 보고 체험해야만 믿을 수 있다는 이들이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생명을 주셔야만 진정한 영의 거듭남이 일어나고, 십자가의 역사를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일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령이 임하심으로 고통받고 핍박받던 이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감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살아있는 소망의 증거입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 역사에서 계속 나타났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는 가톨릭이 지배적이었던 여러 나라에서 개신교도들을 핍박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낭트칙령’이라는 것을 발표해서 일부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자였던 루이 14세가 1685년 낭트칙령을 폐기합니다. 그때부터 1787년 관용이 다시 허용되기까지 엄청난 핍박이 프랑스 개신교도들에게 있었습니다. 프랑스 남부 세벤느산맥에 가면 광야 박물관이 있습니다. 핍박받던 위그노들의 순교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 입니다. 그들은 산으로, 들로, 바다로 숨어다니며 비밀 예배를 드렸습니다. 잡히면 목회자는 처형당했고, 남자들은 노예 가 되어서 배 밑에서 평생 노를 젓는 갤리선으로 보내졌고, 여자들은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시대 모진 고난 속에서도 매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기도제목이 오늘까지 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감사했습니다. 그 들의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 우리에게 매일 아침을 새롭게 하심으로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족을 지켜 주시고 위험해서 구해주십시오. 갤리선에서, 감옥에서 고난 당하는 우리 형제 자매를 지켜 주소서.” 그 박물관에는 당시 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당시 노예로서 노를 젓던 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 고백이 이 문장입니다. “나를 매고 있는 이 사슬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슬이다.” 그들은 평생 사슬에 묶여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야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과연 그들에게 소망 있을까요? 그들에게도 살아있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 때문입니다. 부활 주일을 보내는 우리 모두 이 질문 앞에 대답해야 합 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성도에게 나타난 것처럼 오늘 나에게도 살아있는 소망으로 역사하고 있는 가?, 하늘에 예비 된 유업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얻게 될 영광과 존귀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 스도를 눈으로 보지 못했어도 더 사랑하고 있는가?”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어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살아야 하고, 오늘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살아야 하고, 내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처럼 살아야 한다.” 살아있는 소망으로 부활의 은혜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