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개혁신보컬럼

부적절한 관계 / 이은상 목사(수원노회)

새벽지기1 2020. 11. 15. 07:05

2003년 7월 24일

 

분당신도시에는 자기동네를 ‘천당 아래 분당’이라 부르며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필자가 그 땅에 심방을 갔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점심때가 되어 심방대원들과 함께 주변식당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음식값이 너무 비싸다보니 일행 모두는 값에 놀라고 자존심에 눌려 맛도 제대로 못보고 서둘러 식당을 나왔습니다. 그때 누군가 ‘우리동네에 가면 만 원도 안될 음식인데, 역시 분당은 아무나 사는 동네가 아닌가봐’하며 촌티발언을 하자 모두가 웃어버렸습니다.

 

문화란 가치관을 닮는 그릇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가치관과 그릇의 차이가 적을수록 ‘편하다’는 것이고 그 차이가 클수록 ‘부적절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재래시장에 가야 편하게 장을 보는 주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백화점 외에서는 절대로 장을 못 보는 주부도 있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직 대중교통 이용이 편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가까운 곳이나 교통이 혼잡한 거리에도, 특히 비 오는 날 학교에 간 자식 마중 나가러 갈 때에도 품위 때문에 자가용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언어와 지식과 학벌, 패션, 뷰티, 먹거리, 여행, 숙박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문화현상이 종교생활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큰 교회에는 상류층의 성도들이 많은 것 같고 반대로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에는 소박한 성도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교회도 부익부 빈익빈, 유유상종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적절함과 부적절함의 문화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먼저 우리는 이러한 문화적 현상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류층에는 상류층에 걸 맞는 문화가 있고 중산층은 중산층대로, 농촌은 농촌에 적절한 문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장님은 사장님대로 사업상 고급승용차가 필요하며 고급식당도 가야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결만 추구하는 가난하고 작은 교회에는 정치인이나 변호사나 의사와 같은 상류층 성도는 출석할 때 부적절함을(부담감)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절과 부적절의 문화적 특성 때문에 성도의 90%이상이 대졸자인 교회도 생겨나게 되고, 작은 교회에는 섬기려하는 자들보다 자꾸만 섬김을 받아야 할 자들이 들어오게 되고, 복을 강조하는 교회에는 ‘복(돈)=믿음’이라는 등식을 교회가 강단에서 증명해주기 때문에 검은 부자든 하얀 부자든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가 복음보다 더 능력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추구하는 편안함 속의 우아함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성도로서 부적절함 속의 추함인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을 가르칩니다(빌1:27). 여기서 합당함이란 옷 입는 문화를 말합니다. 마치 아무리 편하고 유행이라도 권사님이 힙합바지를 입고 우아함을 자랑하지 못하듯이 신자에게도 적절하고 구별된 삶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것이 합당한 삶은 아닌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러한 문화적 특성 앞에서 우리는 각자 성도로서의 부적절한 삶은 없는지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성도의 특징은 하나님나라의 윤리와 문화들과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예로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봉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에 입각한 마땅한 크리스찬 문화이기 때문에 성도라면 누구라도 부득이함이 없이 자원함으로 실천합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를 보면 이러한 문화에 부적절함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가령 헌금생활의 경우 매우 인색합니다. 이발, 미용, 사우나, 자장면, 과자 값도 10년 전에 비하면 훨씬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적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역헌금, 주일헌금, 감사헌금을 보면 수년 전 그대로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생활필수의 요구에는 적절하게 대응하지만 영적생활의 요구에는 부적절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치사하게 교회에서 돈 얘기하는 자체가 복음 앞에서 부적절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깊은 예배의 자리, 넓은 봉사의 자리, 높은 헌금의 자리가 적절한가 부적절한가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만일 부적절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십시오. 만일 적절하고 편안함을 느낀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분당 위에 천당’을 소유한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