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통해 우리 삶을 올바른 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욱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고통 자체는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우리의 습성 때문에 고통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두 가지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첫째, 고통을 빨리 제거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둘째, 고통 속에서 우리 내면을 변화시켜서 올바른 자리를 찾게 하십니다. 고통으로 엉망진창이 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숨은 것을 드러내시고 올바른 자리를 찾도록 일하십 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상황이 비정상이었고,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발견하기도합니다. 고통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는 것 같지만,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고 피하고 싶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코로나 재난으로 희생되고 고통 당하는 많은 분들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 코로나 재난이 시작됨으로 인해서 전 세계 모든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6% 줄었다고 합니다. 멸종 위기에 있던 동물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비정상이었고, 우리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해 우리 삶이 올바른 자리를 찾게 하십니다.
고통을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시고 홍해의 기적으로 그 백성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들은 기적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 앞에 찬송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나오자마자 물이 없는 목마름에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이나 되는 큰 인구가 물 없이 3일 동안 방황했습니다. 3일 간의 여정 후에 ‘마라’라는 곳에서 물을 발견했는데, 그곳의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쓰게 하심으로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인생에 서 만나는 쓴물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전능하시기에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우리의 욕망을 채워줘서 단 물로만 행복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쓴물을 마셔 봐야만 물이 달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쓴물을 통해 우리는 단물의 축복과 은혜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모세가 백성들의 불평과 도전에 직면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뭇가지 하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모세가 물에 던지자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잘 듣고 나 여호와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너희가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 가운데 어느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다’”(26절). 마라의 고통을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치료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치료도 행하시지만, 우리의 환경과 상황도 치료하십니다. 더 중요한 치료는 우리 영혼과 마음의 치료입니다. 우리 인생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가 올바른 자리를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적지를 다시 명확하게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 로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와 경로를 자기 스 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재정렬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향과 목적지를 하나님 중심적인 방향으로, 스스로 목적지를 정하는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지로 다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적지는 광야가 아닙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광야는 통과하는 낯선 땅일 뿐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미련을 두고, 집을 짓고, 머물려고 한다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광야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지나가는 땅이라면 그 고통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땅을 애굽과 비교하면서 한탄과 불평으로 시간과 마음을 소비한다면 목적지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광야가 목적지인 것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가 지나가는 땅임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광야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인내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목 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본향을 향해 돌아갈 인생들이요, 또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순례자들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 찾아올지라도 이 땅은 지나가는 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환상을 깨뜨립 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최종 목적지인 것 같은 환상입니다. 이 땅에서 정을 떼고,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생각하고 익숙하 게 달려가며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재난을 통해 모든 인류가 가졌던 환상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감사’ 와 ‘순종’ 을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감사를 배우게 하십니다. 고통은 베일을 벗깁니다. 우리 마음에 숨은 죄를 드러 냅니다. 마라의 쓴물을 경험한 백성들이 불평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오랜 시간 노예생활을 하면서 신세한탄, 불평, 비난이 익숙했습니다. 그 마음에 숨겨져 있던 습관이 고통이 다가 오면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고통을 겪게 하심으로 오랫동안 습관화 된 마음의 질병을 걷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죄의 습관 위에 덧붙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내면에 있는 나쁜 것을 먼저 깨뜨리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과 축복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마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라에서 11km를 가면 ‘엘림’ 이라는 축복의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1km는 먼 거리가 아닙니다. 엘림에는 12개의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습니 다. 풍요로운 땅입니다. 그러나 마라에 있던 시점에서 그들은 엘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불평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림의 오아시스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고통을 통해 장차 엘림의 능력과 축복을 만날 때 감사할 수 있는 영혼으로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하는 삶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순종을 배웁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는 방황했는데 이제 는 주의 말씀을 지킵니다”(시 119:67). 우리의 불순종 습관은 고통을 통해 바뀝니다. 욥이 고통을 통과하면서 받은 마지막 축복은 많은 물질과 자녀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내가 주에 대해 지금까지 내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내 눈으로 주를 보게 됐습니다”(욥 42:5). 귀로 듣는 신앙은 피상적, 형식적인 신앙입 니다. 눈으로 보는 신앙은 체험적인 신앙이요, 순종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고통을 통해 욥은 진정한 순종을 배운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 축복의 통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대개 가장 고통스러울 때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도 그가 어떻게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약속의 땅으로 움직이게 되었습니까? 형제 하란이 그곳에서 죽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이해할 수 없는 고통,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예민한 영혼을 만든 것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이기 때문입니다. 평탄하고 축복된 좋은 환경, 내가 원하는 성취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는 귀를 막아도 생생하게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으로 영혼을 예민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면 놀랍게도 그 순종을 통해 우리는 고난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에게 고통의 시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고통에 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부르짖을 때 나뭇가지를 주셨고, 그 가지를 물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마라의 쓴물에 던져진 나뭇가지는 우리 고통의 한복판에 던져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고통 속에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한복판에 자신을 던지시는 분이요,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시며 함께 고통당하시는 분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쓴물을 단물로, 우리의 고통을 축복으로, 우리의 시련을 감사로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재난의 기간을 지나며 어느 때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십자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고,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죄를 용서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마실 수 있는 물로 바뀐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통으로만 버려질 수 있는 우리 인생이 변하여 쓰임 받는 인생, 영원한 가치 있는 인생으로 우리를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전염병 재난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누리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 삶을 올바른 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욱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 합니다.
'좋은 말씀 > 이재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손 (요한복음 10:28~30) (0) | 2020.05.19 |
---|---|
어린아이다움 (마가복음 9:33~37) (0) | 2020.05.12 |
멀리서 더 가까워지는 공동체 (에베소서 2:13~18) (0) | 2020.04.26 |
부활 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누가복음 24:25~35) (0) | 2020.04.20 |
전염병의 시험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마태복음 4:1~1) (0) | 2020.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