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려면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광경 중 하나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일 것입니다. 성인이 되었지만 내면에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있는 것을 가리켜 ‘성인아이’라고 부릅니다. 성인아이의 모습을 가진 이들의 어린 시절 을 되돌아가 보면 당시에는 ‘애어른’으로 살아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어린아이를 ‘애어른’이라고 부를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진짜 성숙한 케이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착한아이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현상에 빠져 있는 경우입니다. 진짜 성숙한 것이 아니라 성숙한 척하는 것이고, 겉으로만 착한 척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관심과 사랑을 얻어내려 하고,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과 행동을 따라서 행동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모습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성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진짜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른이 보기에 미성숙하고 다루기 힘든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지나야 성인이 되었을 때 온전한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다움과 하나님 나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37절).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깊은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다운 어린이를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자신과 하나님을 어린 아이와 동일시하셨습니다. 어린아이다움 속에 하늘나라와 천국의 본질이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려면 ‘내 이름으로’라는 단어를 해석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 하는 것이라면 어린아이 안에 예수님의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라는 단어를 두 가지로 풀어쓰면 ‘나를 나타내는 자’ 혹은 ‘나와 같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다움 속에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본질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집안에 계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 다. ‘오는 길에 너희끼리 왜 논쟁했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시면서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돼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돼야 한다’”(33~35절).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열두 제자들을 보면 다툴 수밖에 없는 관계였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매국노로 취급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와 같은 사람을 사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나선 사람들이 열심당원입니다. 시몬은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핵심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전혀 다른 직업에서 살던 그들의 삶의 방식과 습관이 달랐을 것입니다. 문화적, 사회적 차이는 때로 누가 더 큰 자인가라는 다툼으로 번집니다. 지배욕 때문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처럼 되라고 유혹했을 때 인간의 마음속에 지배욕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단,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인간에 게 주어진 통치능력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을 때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대리통치 능력은 지배 욕구, 권력 욕구, 자신을 위한 탐욕으로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에 스며있고, 가정에도, 부모와 자녀 간에도, 우리가 만나는 사회에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다움, 자기를 낮추는 것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마 18:4). 예수님은 ‘어린아이다움’을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의 연령은 취학전입니다. 스스로 걷고 행동은 할 수 있지만, 사회생활을 하기 이전의 때를 의미합니다. 그때의 특징은 권력에 대한 욕구가 없을 때입니다. 누 군가를 지배하고, 조종하고, 차별하려 하지 않고, 인종이든, 경제적 차이든, 외모든, 남자든 여자든 간에 차이를 못 느낍니다. 권력이 무엇인지 모르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로 그때를 가리켜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어린아이다움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이 나의 온전한 주님이 되시고, 그분의 성품이 내 안에 형성된다면 그 모습은 어린아이다움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이 가장 큰 종이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왕은 소유된 백성을 위하여 일하는 큰 일꾼입니다. 그래서 그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자는 모든 이를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군림하고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왕과 백성들의 특징은 어린아이다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사람이다”(눅 9:48b). 이 말씀은 천국의 모습입니다. 그 나라의 가장 작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나라 왕이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짜 사랑하고 섬기는 종의 마음을 가졌기에 가장 작은 자와 가장 큰 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모두가 어린아이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돼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돼야 한다”(35절).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시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동물의 먹이통에 누우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실 때는 십자가 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시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의 창조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가 경배해야 할 첫째이신 분인데 그분 스스로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시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섬기신 까닭은 그분의 어린아이다움 때문입니다. 그분을 보내신 이도 어린아이다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과 헌신을 세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지배가 아닙니다. 군림이 아닙니다. 섬김과 사랑입니다. 어린아이다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는 것을 즐기시는 분입니다. 만물의 첫째이신 그분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시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신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 이 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 ‘어린아이다움’
우리가 가장 행복할 때는 어린아이다워질 때입니다. 어린아이는 많은 소유가 없어도 기뻐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보면서 인생을 배우고, 어린아이다움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잃어버린 까닭은 어린아이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다움은 지배하려는 욕구가 없는 순수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영접은 예수님을 나의 주요, 나의 머리요,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다움이 성품과 본질이 되고, 삶의 원리가 되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실한 어린아이다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어린아이다움을 예수 님의 이름으로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숙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다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어린아이 다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다움이 영접되고, 성령 안에서 회복된다면 그 영혼 안에는 천국의 기쁨과 능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존하며 살아가듯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처럼 아버지 뜻에 온전히 순종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달려와서 부모에게 매달리는 것도 어린아이다움입니다. 부모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재물과 생각을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어른으로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랑 속에 거하면서 어린아이다움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첫째이신 그분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 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고, “어린아이 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이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려면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왕이 가장 큰 종이기 때문 입니다. 그것을 기뻐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로 초대 받은 우리 안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다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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