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부활 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누가복음 24:25~35)

새벽지기1 2020. 4. 20. 06:26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증거하고,

우리 안에 부활 생명이 살아 호흡하는 한

반드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막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참으로’라는 단어를 붙여야 할 만큼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의 이면에는 불신을 넘어서는 편견이 있습니다. 그 편견은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기적>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새로운 자연’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여러 자연이 존재한다. 지금의 자연 위에 새로운 자연이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새로운 자연의 문을 연 최초의 사건이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자연의 문이 열려진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자연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자연을 새롭게 하셔서 새 자연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 어떤 재난이 주는 두려움, 죽음의 공포가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 있어야 할 중요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 ‘지금’입니다. 과거 역사나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금,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 있는 지금,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있는 지금, 어떤 이유든지 마음에 낙심이 되고 우울하고 삶의 위기를 이겨낼 수 없는 바로 지금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역사되어야 합니다. 둘째, ‘나에게’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내게 부활의 생명이 역사한 것입니다. 참된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 두 단어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생명으로 지금을 살지 않거나 나에게 역사하시는 생명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역사의 고통이 찾아올 것입니다. 어떻게 역사의 위기와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 이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순결하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음모에 의해 불법 재판에 넘겨지고, 어리석은 군중들의 외침을 통해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제자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소수의 증인들이 빈 무덤을 보았지만 모든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직접 보았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고, 삶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자체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죄악이 깊다는 것입니다. 절망한 채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힘이 없었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모든 만남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단지 증명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여정에 동행하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 안에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임재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실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더디게 믿는 사람들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 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이 무슨 이야기요?’ 그들은 슬픈 기색으로 가던 길을 멈추어섰습니다”(눅 24:15~17). 16절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라고 했습니 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자연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분은 땅에 계시지만 새로운 자연과 연결하는 문이 되셨고, 길이 되셨고, 생명이 되셨습니다. 새로운 자연의 실제를 볼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과학의 탐구도 아닙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들의 눈이 왜 가려져 있습니까? 예수님은 후에 이것에 대해 “마음에 더디 믿는 불신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실제를 보는 눈은 오직 믿음으로만 열립니다. “그분이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이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 말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 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 분을 넘겨주어 사형선고를 받게 했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지 벌써 3일째 됐는데 우리 중 몇몇 여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이 예수께서 살아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 보았더니 그 여인들이 말한 대로 그분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눅 24:19~24).


예수님께서는 일어날 모든 일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수치와 모욕과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해석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고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게 믿는 사람들이여!’”(25절). 부활을 더디 믿으면 예수님의 모든 삶이 해석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연결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곧 부활을 바라보는 것이요, 부활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 생명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더디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까이 동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더디 믿는 우리들에게도 가까이 있으십니다. 우리 삶에 동행하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 손님으로 우리 인생에 찾아와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더디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때에도 동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이지 않을 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곁에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살아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두 사람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스스로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해 언급된 것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27절).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엠마오에 도착해서 식사하는 중에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상에 기대어 앉아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떼어 그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30~31 절). 예수님을 알아본 이후에 그들이 한 대화에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이 서로 물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느냐?’”(32절). 길에서 구약 성경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눈이 열린 것입니다. 슬픔이 자리 잡고 있던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슬픔이 떠나갔습니다. 그들의 무지는 참된 진리를 깨닫는 지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다시 희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뜨겁게 되는 까닭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증거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성경을 읽고, 공부해도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만이 우리 눈을 열게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눈이 열리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은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상처로 마음이 굳어져 있으면 눈이 가려져 영적 실제를 보지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마음이 뜨거워지면 눈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임하여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이들이 “주님은 참으로 살아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참으로’라는 단어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부활주일을 맞아 “주님은 참으로 살아나셨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부활의 증인과 증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믿기를 거부하고 마음에 더디 믿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부활 생명으로 살아 호흡하시는 예수님의 임재가 필요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도 부활 생명으로 호흡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부활 생명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더디 믿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여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우리 안에 부활 생명이 살아 호흡하는 한 그들은 반드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