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공동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멀리 있기에 더 가까워짐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요즘은 서로 거리를 두는 일이 미덕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단어가 세계적인 표준어가 되었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는 이를 꼭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는 이 단어를 뒤집어야 합니다. 그것을 ‘멀리서 더 가까워지는 공동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 가족으로서 멀리서 더 가까워지는 공동체입니다. 코로나 감염병 재난으로 인해 우리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건물이 교회였다면 교회는 이 재난으로 인해 무너진 것입니다. 교회의 활동이 교회였다면 교회는 망했습니다. 예배당에 모여야만 예배가 가능했다면 예배는 이 땅에서 중단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닫는 교회의 본질이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눈에 보이는 영역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더 강조합니다. 교회의 일차적인 활동은 성령 안에서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할 때 사용된 모든 동사의 주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로 둘을 하나로 만드셔서 화평이 되셨고, 그리스도께서 둘을 한 새사람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셔서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가게 하셨습니다. 모든 주어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교회의 일차적인 활동은 우리 안에서, 성령 안에서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은 어떤 활동 이전에 어떤 존재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를 기능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공동체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13절). 이것이 인간 존재의 시작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네 가지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거대한 무지의 짙은 구름입니다. 짙은 구름이 있을 때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무지의 구름이 있을 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죄악이라는 거대한 산맥입니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측량할 수 있지만, 우
리가 쌓은 죄악의 산맥은 계산할 수 없습니다. 셋째, 거룩한 진노라는 깊은 협곡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건널 수 없고 빠져나올 수 없는 협곡이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두려움의 바다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려움의 바다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멀어지기로 택한 인간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막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의지로 선택할 능력을 주셨기에 인간의 결정대로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불행한 일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과 회복의 길을 내어 주셨을 때 그 구원의 길을 스스로 택할 수 있도록 기다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에 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나님 과 멀리 있던 이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뿐만 아니라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을 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배와 찬양과 사랑과 순종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습니다. 우리의 선택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인생인지를 깨닫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멀리하며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 합니다. 그 결과는 재앙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만큼 인간은 고통스럽고, 하나님을 멀리한 만큼 인간은 불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심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는 삶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공동체입니다.
거리두기 뛰어넘는 유일한 공동체
“그리스도는 오셔서 먼데 있는 여러분에게 화평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평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17~18절).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화평과 평화를 공동체 가운데서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거리를 두었던 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죄와 사탄과 거리를 두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과 거리를 둔 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거리를 둔 인간에게는 참된 화평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사람들은 사람들끼리도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단, 그리스도의 피로 관계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을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회복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화평이라는 선물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분은 이른바 교회에 다니는 분입니다. 그러나 멀리서도 가까워지는 분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된 분들입니다. 교회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녀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이 교회가 된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소외와 외로움은 다릅니다. 외로움은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갈등이나 적대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소외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외감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소외는 하나님과 거리를 둠으로써 인간안에 발생한 소외입니다. 사도행전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가장 큰 위기는 이방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거리두기 아니었습니까? 믿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하여 율법을 요구하고, 그들과 같이 하기를 원하지 않고 거리두기를 계속했기에 사도행전의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류를 두 부류로만 구분했습니다. 유대인과 개들(이방인들)입니다. 헬라인들도 인류를 두 부류로 구분했습니다. 헬라인과 야만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거리두기의 역사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를 두며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희망일 수 있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 ‘한 새사람’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쓴 단어는 ‘한 새사람’입니다. ‘거리두기로 인한 소외가 없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거리두기로 인한 소외가 없기에 화평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경험한 사람들, 피 뿌림을 경험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는 이들은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던 우리들을 회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이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된 새사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 정말 아름다운 미덕들이 많습니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가면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남녀를 구별하기 위해 ‘ ㄱ’자로 예배당을 건축해서 유명한 교회입니다. 건축물보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덕삼(趙德三)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은 김제 지역의 부자였습니다. 조덕삼 장로님의 마부인 이자익(李自益)이라는 청년이 17살에 예수를 믿게 됩니다. 당시는 신분 사회였는데 주인인 조덕삼과 종인 이자익이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월이 지나 교회의 장로를 뽑는 날이 되었는데 당연히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자익이 장로 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곳은 전라북도 김제인데 이자익은 경상도 출신이었습니다. 신분과 지역을 뛰어넘는 결과가 나오자 예배당은 조용하고 긴장감마저 돌았다고 합니다. 이때 조덕삼이 일어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금산교회 교인들은 오늘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오늘날 집사)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교회를 더 잘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조덕삼은 몇 년 후에 장로가 되셨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가 영적 은사가 탁월하다는 것을 알고 평양신학교에 보냈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전부 지원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자익 장로가 훌륭한 목회자로 세워집니다. 조덕삼 장로님은 후에 이자익 목사님을 금산교회 목사님으로 초청합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 이나 연임하면서 한국 교회를 이끄셨습니다. 그분들이 예수님을 잘 만났기에 모든 벽을 허물고 그리스도의 피로 한 새사람이 되었습 니다. 세상이 생각할 수 없는 한 새사람, 모든 담과 벽을 허물고 한 새사람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멀리 있었지만 가까워졌습니다. 사회의 신분과 가정의 경제적 격차를 보면 멀리 있어야 마땅한데 더 가까워지는 공동체가 되었고, 이 두 가정은 지금까지도 서로를 축복하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재난을 통해 교회를 흔드시는 이유는 오직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누리고, 멀리서 가까워지고, 안전 외에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용납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 재난의 기간을 통과하고 우리가 함께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공동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멀리 있기에 더 가까워짐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만일 그런 교회가 된다면 재난은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요동치는 세상의 정치와 세상의 타락한 문화가 결코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을 움직여 하나님과 성도들과 더 가까워지는 교회 지체임을 기억하고, 이 재난의 때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이겨나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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