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탈육신 시대의 성육신적 교회 (누가복음 5:33~39)

새벽지기1 2020. 5. 25. 11:34

“신랑으로 임재하신 그리스도, 세상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성령의 교통 하심을 통하여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온전히 붙잡을 때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급변하는 사회의 중심에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시대에 어떻게 대응해 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핵심 단어는 ‘비대면’(untact)이라고 합니다. 안전을 위해서 서로 대면하지 않는 원리가 세상의 중심 원리가 될 때 언제나 사람을 마주하여 교제하고 예배드리고 복음을 전했던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인가 하는 숙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계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고, 신체접촉이 불법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가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건강한 인격적 교제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미디어들에 의하여 사람들의 영혼이 더러움에 점점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점점 분리되고, 상상과 현실 사이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탈육신 시대와 신앙의 탈육신 현상


호주 몰링신학교 선교학 교수 마이클 프로스트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탈육신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탈육신 시대 현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분리주의적인 이원론이 나타납니다. 신앙과 세상이 분리됩니다. 교회 안의 신앙으로 머무르게 되고, 신앙과 삶이 별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삶으로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형식, 제도로 분리되어서 교회 안의 문화로만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점점 더 세상과 격리되고, 분리되고, 우리가 아는 것과 삶 이 상관없는 것으로 분리되는 것을 ‘신앙의 탈육신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위선이 나오고, 외식이 나오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탈육신 현상이 나타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자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율법이 정한 규례, 엄밀히 말하면 율법이 정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그들 나름대로 해석한 규례에 따른 규칙입니다. 탈무드나 미드라시 같이 율법을 해석한 해설서에 근거해서 자신들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잘 지키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그것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세상에서 살아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죄인으로 분류하고 있는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식사하시고, 제자를 삼기도 하셨 습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눅 5:31~3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병든 영혼을 고치는 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주제로 또 다른 도전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금식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깨끗한 몸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금식은 이미 금식의 규칙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공개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금식의 본래 모습은 영혼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고, 마음을 낮추게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육체를 자랑하고, 영혼을 더욱 교만하게 만드는 정반대의 결과가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탈육신화 된 현상입니다. 영혼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도리어 육체를 위하여 사용되고, 겸손을 위해 제정된 제도가 오히려 교만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인간이 탈육신화 될 때 나타나는 모습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회에 다녀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신앙과 교회로서 살아가는 신앙은 다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예배당에 자신의 몸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예배당 건물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임재하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5장 후반부에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탈육신적인 시대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교회의 본질, 세상 속의 교회로 존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성육신 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같으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초대받은 사람들을 금식하도록 하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들도 금식할 것이다”(34~35절).
우리 내면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신랑 ’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신랑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연합된 자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백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신랑을 만난 기쁨, 신부가 신랑과 연합하는 기쁨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유대인들은 일정한 기간이 결혼 기간입니 다. 유대인들은 신부가 신랑을 기다립니다. 기다렸던 신랑이 나타났을 때 신부의 기쁨이 증가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신부가 기다리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늘 준비하고 있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부가 신랑을 만날 때 금식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으로 오셨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의 기간에 어떻게 금식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평상시보다 좋고, 많은 음식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신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육체를 자랑하고 교만해지는 금식 속에 살아가고 있었지만, 우리의 금식은 다릅니다.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 때 금식합니다. 먹을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슬픔의 금식 이 아니라 기쁨의 금식입니다. 신랑 되신 예 수님을 만난 기쁨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아도 영혼이 풍성하기에 육신의 배고픔을 잊어버리는 또 다른 차원의 기쁨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임재의 기쁨이 부족하거나 사라졌다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과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과 연합된 기쁨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요, 모든 환난과 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신랑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입니다. 그것이 교회됨 의 본질이자 교회의 생명력이요, 능력입니다.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시는 그리스도


둘째,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낡은 옷을 기우려고 새 옷을 자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옷이 찢어져 못 쓰게 되고 새옷의 조각도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36절). 옷은 정체성을 나타내는 문화입니다. 바리 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유대교의 전통은 헌옷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새옷과 같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탈육신화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외식적, 분리주의적, 율법주의적인 전통은 헌옷이었습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예수님의 복음을 율법주의에 맞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될 수 없는 것입니다. 헌옷을 고치려고 새옷을 기울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전통은 세상과 분리된 옷을 입는 것입니 다. 교회가 세상의 여러 영역 중에 하나로 존재한다면 교회는 세상의 질서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성장해도 한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인 틀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입혀주신 복음의 옷은 세상 속으로 침투합니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교회로 존재합니다. 성도들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로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속의 성직자, 사역자, 교회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입어야 할 옷입니다. 복음의 옷은 우리를 세상 속에 침투하도록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유대 문화 속에 가두려고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 서신서에 나타난 모든 갈등은 복음이 유대 문화의 껍질을 벗고 온 인류의 복 음으로 전해지는 역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기 쁘게 여기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그를 핍박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예루살렘 공의회가 나옵니다. 1천 년 이상 내려온 율법을 중심으로 만든 그들의 옷을 벗는 결정이었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없었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끊임없이 내려야 할 결정은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옛옷을 벗고 새옷을 입는 것입니 다. 분리주의적, 율법주의적, 형식주의적으로 탈육신화 된 우리의 모든 껍데기를 벗고 본질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들어가는 복음의 옷을 입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율법주의의 옷으로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옷은 어떤 시대, 민족, 문화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세상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사회가 어떻게 변화될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변화는 될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이고, 탈육신화된 신앙의 껍데기만 붙잡고 있는 교회는 쇠퇴할 것입니다. 세상과 함께 휩쓸려 갈 것입니다. 변화에 휩쓸려 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 안에 있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헌옷을 고치려고 새옷을 갖다 붙여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새옷을 분명하게 깨닫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속에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 세상의 기관 중에 하나가 아니라 세상 속에 침투해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본 회퍼는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교회는 일반적인 인간생활의 문제와 짐을 함께 나누어지되 지배함으로써가 아니라 돕고 봉사함으로 져야 한다. 교회는 모든 직업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하여 성육 신하 시는 그리스도의 임재


셋째,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하여 성육신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새 포도주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묵은 것이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37~39절). 당시 유대 사회는 물이 귀하고, 포도주를 약으로도 사용했기 때문에 집집마다 포도주를 담갔습니다. 포도주를 담글 때는 드럼통 같은 곳에 포도를 가득 넣은 후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발로 밟았습니다. 그러면 밑에서 즙이 나오는데 그 즙이 나오는 곳에 가죽 부대를 두면 가죽 부대에 들어가서 발효가 됩니다. 발효가 돼야 포도주로 변합니다. 가스가 나옵니다. 팽창합니다. 그래서 가죽 부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번 늘어났다 줄었다 한 가죽 부대는 유연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즙을 담게 되면 더 이상 팽창할 수 없기 때문에 터지는 일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조점은 새 포도주에 있습니다. 새 포도주가 아니라면 옛 가죽 부대를 사용해도 상관없습니다. 새 가죽 부대가 필요한 것은 새 포도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이 땅에 오신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성령의 교통 하심이 이루어지는 새 포도주가 부어진 것입니 다. 우리는 새 포도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임하는 시대가 주어졌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개인에게 임하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할 때 교통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야 하는 이유는 성령님 의 교통 하심 때문입니다.

 

혼자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가 나에게도 임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은사도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능력과 깨달음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치유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로마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왜 지하 무덤에서 모였을까요? 외로움 때문이 아닙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함께 있겠다”라고 하신 것도 성령의 교통하심 때문입니다. 탈육신 시대에 비대면 중심의 사회가 되었을지라도 성령의 교통 하심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안전을 지키며 어떤 모습으로라도 성령의 교통하심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일어납니다. 함께 모여 성령의 교통하심에 귀를 기울일 때 바람처럼 움직이시는 성령과 함께 우리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성령과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력으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외부의 환경은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내부의 연약함으로 무너졌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는 물이 많다고 가라앉지 않습니다. 오히려 깊을수록 배가 잘 뜹니다. 그러나 내부에 물이 스며들면 배는 가라앉습니다. 배의 균형을 잡는 무게가 사라지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신랑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신 그리스도, 세상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성령의 교통 하심을 통해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우리가 온전히 붙잡을 때만 이 시대를 극복하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