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보지 않은 길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도입니다. 그 지도는 살아있어야 하며,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미래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지도를 만들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개척자로서 지도를 만들어가며 여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계는 새로운 지도를 만들
며 여행해야 하는 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갔고, 새로운 지도를 만들며 여행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려서도 안 됩니다. 지도가 없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변명해서도 안 됩니다. 지도를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생활을 마
치고 가나안을 향한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40년 동안 이리저리 다녔지만 요단강 너머에 새로운 길로는 가보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광야에서 태어난 다음 세대들입니다. 그들은 출애굽 한 경험이 없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걸음에 익숙해져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요단강 너머에 다가올 가나안 정복
시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면서 여행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새롭게 일어났습니다. 가나안 정복 시대를 맞이하는 그들에게는 또 다른 영적 체험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계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단강 앞에 서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요단강을 만난 백성들은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요단강 앞에 도착했을 때는 봄인데, 봄은 그 지역으로 말하면 추수의 때요, 헬몬산에서 눈이 녹은
물이 내려와서 큰 강물을 이루어 범람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물입니다. 그 강물 앞에 멈추어 섰을 때 그들은 두려웠고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없는 백성들은 범람하는 요단강에서 당황했을 것
이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뛰어넘어야 하는 장애물이었지만 자신들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강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전염병의 재난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백신을 만들고 치료약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회는 더 붕괴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빠른 해결책일 수도 있습니다. ‘ 요단강’ 이라는 단어는 죽음을 떠오르게 하는데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 있어서 요단강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새로운 미래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동시에 장애물이 요단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이 지금 서 있는 길은 그들 스스로 정하고 걸어온 길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걸어온 걸음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장애물을 만나면 ‘ 내가 길을 잘못 길을 들어섰다’ 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걸어온 길이라면 장애물이 있다 할지라도 올바른 장소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할지라도 올바른 위치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앞서 가시며 함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3일 동안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강을 건너는 방법까지 알려주셨습니다. 새로운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광야를 지나올 때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던 방법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서가면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를 지날 때와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광야
에서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구름기둥의 인도하심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광야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와의 산을 떠나 3일 길을 나아갔는데 여호와의 언약궤가 쉴 곳을 찾아 3일 동안 그들 앞에서 진행했습니다”(민 10:33).“ 23일 후 지휘관들이 진영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했습니다. ‘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와 레위 사람들인 제사장들이 그 궤를 메고 가는 것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있던 곳을 떠나 그 궤를 따라가라. 다만 너희는 그 궤와 거리가 약 2,000규빗쯤 되게 하고 궤에 가까이 가지는 말라. 그러면 너희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이 길로 지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3~4절). 우리가 장애물을 만날 때 1차적인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이미 받은 말씀, 이미 주어진 약속, 이미 우리가 순종하며 지켰던 하나님의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 너희는 스스로 정결하게 하라. 내일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말했습니다. ‘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서 강을 건너라.’ 이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서 갔습니다”(5~6절).
여호수아에게는 믿음이 있고, 기대가 있습니다. 앞에는 요단강이 범람하고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고, 배를 띄울 수도 없고, 어떤 장치를 통해 건너갈 수도 없고, 백성들은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믿음이 있고 기대함이 있습니다. 지휘관들과 여호수아의 명령을 통해 강조되고 있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 앞서’ 라는 단어입니다. 3절에서 “그
궤를 따라가라”고 했고,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서 강을 건너라”고 했고, 11절에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약궤는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 안에서의 기도요, 교회 공동체의 하나 됨이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모세를 통해 주어졌고, 모세 시대에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여호수아 시대에도 함께하심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백성들과 동행하십니다. 출애굽을 함께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요단강 앞에 함께 서
있습니다. 모세에게 “당신이 40년 동안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라고 질문하면 아마도 “여호와께서 친히 네 앞서 가시고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며 너를 떠나지도, 너를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친히 앞서 가시며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앞서 가시며 함께하십니다. 언약궤와 구름기둥을 통하여 앞서
임재하시고 행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함께하셨습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미래의 지도가 되어 주십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미래의 지도입니다.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갈 때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앞서 가심으로 미래의 지도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가보지 않은 길로 가라”고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친 앞서 가시며 인도하십니다. 백성들에게는 당황스럽고 생소하고 낯선 길이지만, 하나님은 그 땅을 오랫동안 주목하셨습니다. 그 땅을 향한 심판을 계획하셨고, 그 땅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땅으로 변화시키기 원하셨고, 그 땅을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증거 되기를 계획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로 인하여 두렵고 불안할 수 있지만, 미래의 지도가 되시고, 친히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한 걸음 앞서 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거리에서 앞서 가십니다. 여호수아 3장 4절을 보면 “그 궤와 거리가 약 2,000규빗쯤 되게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2천 규빗 약 900m 정도 됩니다. 눈으로 바라보고 따라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심을 우리가 따라갈 때 새로운 미래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나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 어느 방향으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있다면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뒤늦게 그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를 하루로 계산하지만, 창세기 1장부터 구약 전체의 시간 개념은 저녁부터
아침까지입니다. 유대 절기는 일몰부터 다음일몰까지입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가 유월절 하루입니다. 모든 절기는 일몰부터 다음 일몰까지입니다. 그것이 하루입니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짐을 내려놓고 쉼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쉬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지만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아침이
되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쉬고 잠 잘 때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고 계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둘째,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복합적입니다. 다중적입니다. 어떤 장애물이 나왔을 때 우리는 그 장애물이 해결되는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장애물을 통해 또 다른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요단강을 단지 길을 통과하기 위해서만 앞에 두
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을 통해서 장차 가나안을 정복할 때 도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여호
수아의 리더십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 내가 모든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너를 높일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했듯이 너와도 함께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알게 될 것이다’”(7절).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은 모세의 리더십을 세워주셨습니다. 광야 시대를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
을 정복하는 전쟁을 해야 하는데 여호수아의 권위가 없다면 어떻게 명령이 백성들에게 전해지겠습니까? 그래서 요단강
을 건널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영적 리더십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보는 앞에서 여호수아를 높이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전에 모세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의 생애 내내 그를 두려워했습니다”(수 4:14). 또 다른 목적은 요단강이 멈추어 서며 통과하는 기적을 통해 가나안 민족의 마음을 두렵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이후의 말씀을 읽어보면 백성들에게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용기와 믿음 등 심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민족에게 왠지 모를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전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가시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가나안 민족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재난을 당할 때 믿음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재난 너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려운 목적을 갖고 계시기에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이 대표적입니다. 요셉은 성실했지만 그의 삶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성실하게 살았지만 성실할수록 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정직할수록 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역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형님들의 자손들을 보존하시고 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여기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로 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의 주인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창 45:7~8). 우리의 고난에 대한 해석은 먼 훗날 과거를 되돌아보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하나님 역사의 한 부분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 고난에 처하게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기에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본 적이 없는 길에서 놀라운 일을 셋째,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본 적 없는 길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 너희는 스스로 정결하게 하라. 내일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
하실 것이다’”(5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늘 익숙한 발걸음, 가본 길, 나의 경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가보지 않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도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인도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갈 때 우리 영혼이 깨어나게 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긴장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게 됩니다. 여호수아 3장에서 로운 명령이 나옵니다. 광야에 있을 때는 새로운 명령이 었고, 있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반복되고, 오래되면 사람
들은 ‘ 자연’ 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은 습니다. 익숙한 삶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새로운 길에서는 새로운 명령이 필요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하듯이 하나님께서 새로운 명령을 주십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이라는 장애물은 하나님의 새로운 명령을 받는 기회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불투명한 미래는 하나님의 새로운 명령을 받는 기회입니다. 호수아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맞이하게 될 때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정결한 자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하십니다. 내일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는 오늘 우리를 결하게 하는 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도전과 위기와 장애물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요단강이 제사장들이 앞서 발을 딜 때 갈라졌습니다. 홍해와 정반대입니다. 홍해는 다 갈라놓고 걸어가게 하셨지만, 제사장들이 발을 디뎠을 때 요단강이 멈춰 서게 하셨습니다. 요단강 앞에 섰을 때는 믿음의 참여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홍해 때는 뒤에서추적해오는 애굽의 용사들을 무찔렀지만, 요단강을 통해서 앞에 있는 가나안 민족들을 무찌르게 하셨습니다. 홍해는 백성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갈라졌지만, 요단강은 여호수아의 믿음의 권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한 믿음을 가지고 걸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보지 은 길을 가야 할 때 죽은 믿음은 반드시 두려움에 사로잡
힙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 새로운 명령을 기다립니다. 믿음의 눈을 뜨고 예전보다 더욱
깨어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거센 물결 소리만 들립니다. 세상의 비
참한 소리만 들립니다. 그러나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따라가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행하
시는 놀라운 기적의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지 않은 길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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