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믿음 시리즈 ② 아벨의 믿음과 에녹의 믿음

새벽지기1 2019. 9. 5. 07:52


지난주에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보았습니다. 1절은 믿음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 11:1) 믿음을 정의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믿음은 가짜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믿음은 진짜입니다.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은 90% 정도 비슷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혼동합니다. 가짜를 붙들고 진짜라고 착각한 사람들은 한참 지난 후에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진짜를 붙든 사람들은 결국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열매,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정입니다(2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거절이라고 합니다. 상처 중에 제일 큰 상처가 거절의 상처입니다. 상사에게, 부모님께, 선생님께,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믿음을 갖고 나가면 하나님은 누구든지 다 인정해 주십니다. 여러분, 이 천지가 창조된 것을 인간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간의 의지, 상식, 지식, 진화론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세계는 믿음으로 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 믿음을 공부하게 됩니다. 4~6절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의롭다 인정받은 아벨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이로써 그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에 대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으로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히 11:4) 아벨의 믿음이 4절에, 에녹의 믿음이 5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4장 1~8절을 보면 읽기는 읽지만 당황스럽습니다. 질문이 많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이 아벨은 축복하시고 가인은 축복하지 않으셨을까?’ ‘이것이 지금 우리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창세기를 읽으면서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한두 번쯤은 해 봤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면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성경을 대충 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믿음이었고, 가인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한 믿음이었습니다. 4절을 자세히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이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2절에서 믿음의 축복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원래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많이 오해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말하면서 긍정적인 생각,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적극적인 행동에 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너무 오래 들었습니다. 이것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믿음의 한 부분이지 핵심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할 때 그 믿음의 핵심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주제입니다. 우리 신앙의 대전제는 ‘나는  죄인이었지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입니다. 이것을 맨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이 아벨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 4장 1~8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그녀가 임신해 가인을 낳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내가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하와는 다시 가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 되고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됐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가인은 땅에서 난 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오고 아벨은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양 떼의 기름을 제물로 가져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인정하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구었느냐? 만약 네가 옳다면 어째서 얼굴을 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옳지 않다면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해 그들이 들에 나가 있을 때 가인이 일어나 그의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창 4:1~8)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인은 곡식으로,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  


우리가 여기서 몇 가지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첫째, 아벨은 양치는 목자기 때문에 제사를 받으셨고,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직업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둘째, 제사를 드리는 형식, 방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것을 자꾸만 다르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정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는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뭘까요? 어린양의 피의 제사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드리는 제사는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릴 때 내가 좋아하는 찬송, 내가 좋아하는 교회, 내가 좋아하는 예배 스타일로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가다보면 가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어린양의 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 것을 상징합니다. 이 제사가 아벨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님도 이 땅에 태어나시지 않았고 십자가도 없었지만 양을 잡아 드린 제사 자체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와 연결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상일에 쫓겨 바쁘게 살다가 아무 것이나 갖다 놓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창세기 4장 4절을 보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들과 양 떼의 기름을 제물로 가져왔지만 가인은 농산물을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땅에서 난 것을 제물로 가져오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헌금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돈을 드리십시오. 세상 돈으로 하지 마십시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을 하십시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면 하면서도 화가 납니다. 가인도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살인을 했습니다. 이런 결과가 옵니다.  살아서 증거하는 믿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아벨의 제사가 피의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물의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여러분이 농사를 짓더라도 제사는 양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양의 새끼와 기름이었습니다. 둘째, 창세기 4장 4~5절에 놓치기 쉬운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 ‘아벨과 그의 제물’이란 표현입니다.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제물을 드리더라도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먼저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고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분명히 아벨은 준비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벨은 믿음도 있고, 순종도 있고, 의로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은 제물뿐만 아니라 가인 자체가 믿음이 없고, 건들건들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4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여러분이 죽어도 믿음은 계속 말을 합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하루에 5시간씩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다 소천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믿음은 제게 살아있습니다. 믿음은 살아있습니다.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믿음은 살아있습니다. 혹시 부모님이 믿지 않았더라도 여러분은 믿음이 여러분 자녀에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대대로 말을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믿음은 의인을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벨을 통해 배우는 믿음은 의롭게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 중에 최고의 믿음은 병을 고치는 믿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믿음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여러분이 기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에 놀라지 마시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에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에녹  


아벨의 믿음이 의롭게 되는 믿음이라면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들려가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히 11:5)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의 모델입니다. 저는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하고 신비스러운 믿음을 구하지 마십시오. 진짜 믿음은 의롭다함을 인 쳐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태풍이 불고, 지진이 나고, 천지가 무너져도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못 구하면 나중에 굉장히 허탈해집니다. “내가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새벽기도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이 고작 이것이냐?”며 시험에 듭니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의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 믿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가난해도 좋고, 부자가 되도 좋고, 병들어도 좋고,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동행의 축복아벨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고,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인정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정하십니까? 의롭다고 말씀하십니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나이는 365세입니다. 300년 동안 동행했다고 하니 몇 살부터 동행했을까요? 65세입니다. 이때부터 에녹은 하늘나라로 올라갈 때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동행했다’는 말은 ‘대화했다’ ‘교제했다’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만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요 15:7)’이라는 표현도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내 영혼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다면 사탄, 어둠, 저주, 질병, 슬픔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저는 빨래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러분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이제 나와 함께 걷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오늘도 해가 뜨자마자 동행을 했습니다. 매우 친밀한 교제, 대화, 하나됨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300년 쯤 되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집보다는 내 집이 더 가깝구나. 나와 함께 가자.” 에녹은 그렇게 그냥 하나님의 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을 보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에녹은 들림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날갯짓을 한다고, 노력하고 애를 쓴다고 들림을 받겠습니까? 내가 들림을 받으려면 누군가 끌고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끌고 올라가십니다. 이것이 휴거입니다. 어느 날 우주에 대실종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한 사람은 올라가고 다른 한 사람은 올라가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동행의 비밀, 하나님께서 에녹과 300년간 동행했다는 이 신비스러운 사건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아벨의 믿음과 에녹의 믿음을 여러분의 것으로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좋은 말씀 > 하용조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기와 은혜  (0) 2019.09.17
믿음 시리즈 ③ 노아의 믿음  (0) 2019.09.10
믿음의 실체  (0) 2019.08.29
사랑의 심포니  (0) 2019.08.27
성숙한 사랑  (0) 2019.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