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가 사랑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제목은 사랑의 심포니, 사랑의 합주곡입니다. 사랑은 여러 악기가 연주하여 하나의 신비스러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합주곡과 같습니다.
삼위일체적 관계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인데 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 사랑의 합주곡에서 필요한 악기는 세 가지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 중 한 가지만 빼도 불협화음이 일어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인데’라는 말씀을 그냥 읽으면 안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인 것처럼 삼위일체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연주, 소망의 연주, 사랑의 연주를 들어야 합니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이야기 할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일 없이 신비스럽게도 이 세 분이 한 분인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성부, 믿음은 성자, 소망은 성령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7~8) 사랑과 하나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에게서 사랑이 나옵니다. 이 사랑은 성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히 12:2)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신 예수를 바라봅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나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믿음이 나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믿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 생활 가운데 모든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흘러넘치게 하시기를 빕니다.”(롬 15:13) 소망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모두 성령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 소망, 사랑이 삼위일체적으로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고 영향력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씩 축복을 찾아보겠습니다.
블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
먼저 믿음의 축복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믿음의 축복 첫 번째,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립니다. 믿음의 세계는 이성, 합리성의 세계와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의 기준은 믿음이 아니라 합리성, 상식, 이성입니다. 세상은 합리성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합리성, 이성에는 기적이 없습니다. 합리성의 세계에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합리성이 아닙니다. 설교 중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고 하면 ‘에이~’합니다. 합리성,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성, 합리성의 세계에 살지만 실제로 우리가 부딪히는 것은 이성과 합리성을 초월한 일들입니다. 내 아들이, 사랑하는 아내가 죽을병에 걸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성으로 판단해봐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위기를 맞았을 때 합리성에 공을 들인다고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이성과 합리성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인생의 위기, 폭풍, 죽음, 절망에 부딪히면 이성과 합리성을 찾지 않습니다. 그 순간 이성과 합리성은 잊어버리고 믿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얼마나 많은 현대인이 불안하고 당황해서 잠들지 못합니까? 이성, 합리성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합리성은 약을 먹으라고 합니다. 약을 먹으면 어느 정도는 해결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데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 누가 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성으로 살았던 사람은 이성을 붙잡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성이 아닌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붙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바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믿음의 세계와 합리성의 두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와 합리성의 세계 사이에서 어느 세계를 택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합리성의 세계는 갈수록 안 됩니다. 합리성의 세계는 불안합니다. 거부하고 무시하고 부정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기뻐합니다. (요 20:29, 마 17:20)
열리는 믿음의 세계
믿음의 두 번째 축복은 믿어지지 않던 하나님을 믿게 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은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느냐? 어떻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느냐?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느냐?’며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안에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뜹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고 힘들어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이 믿어집니다. 내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일 년에 한두 번 교회에 오다가 어느 날부터 자꾸만 오게 됩니다.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 날이 오늘이길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면 자꾸만 하나님에 대해 좋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믿어집니다. 속으로 ‘믿습니다’라고 자꾸 해봐야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사실 이처럼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2천 년 전에, 30대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으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현대인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나는 어떻게 믿었지?’하는 생각을 하면 감동을 받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기적을 받아들이고, 희망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까지 되었잖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이 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일이 잘 되지 않더라도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믿음의 세계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잡히지도 않고,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성령이 계시면 믿음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절망을 절망케하는 희망
둘째, 희망입니다. 희망은 미래를 여는 문이요 절망을 절망시키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꿈, 이상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적으로는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비밀이요, 다른 하나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성도들에게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십니다.”(골 1:27) 비밀이 있습니다. 다 드러난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입니다. 그래서 미래적 의미가 있습니다. 비밀의 내용이 희망을 만드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영원한 비밀을 갖고 있습니다. 그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러나 다 안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소망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히 6:19) 이 말씀을 보면 ‘소망은 영혼의 닻’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안전하고 튼튼하게 묶어 놓은 영혼의 닻 같아서 희망에 믿음을 걸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된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딛 2:13).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소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소망은 진리의 말씀, 곧 복음 안에서 여러분이 이미 들은 것입니다.”(골 1:5) 성경을 보면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나오는 말씀이 굉장히 많습니다. 믿음 없이 소망 없고, 소망 없이 사랑 없고, 사랑 없이 믿음 없습니다. 희망은 인생의 등대와 같습니다. 희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직업, 가정에서 어려움이 생겨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붙들고 있으면 살아납니다.
희망과 성경적으로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약속입니다. 구원, 회복, 치유, 평안, 천국 등 성경에 수 없이 많이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속과 희망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찬란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람들은 그 약속을 멀리서 보고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비밀, 약속을 남겨두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밀, 약속을 아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와~ 와~’하는 감탄사가 나옵니다. 세상을 이길 능력이 생깁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셋째,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랑의 정의를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아가페)이시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과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은 다릅니다. 만약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한다면 인간의 지저분한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오해합니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뒤범벅을 만들어서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에 조건이 붙고, 배신이 생깁니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헌신적이고 희생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신실합니다. 진짜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실망하지도 않고 상처 받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는 것은 모두 인간의 사랑 때문입니다. ‘목사의 사랑은 괜찮겠지’ 해도 별 것 없습니다. 장로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누구를 막론하고 조건적이고 순간적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사랑받는 인간
인간의 사랑의 표현은 감정적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많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적이 아니라 의지적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도 사랑하시고 우리가 잘못해도 사랑하십니다. 사랑은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해야 합니다. 의지적으로 저 사람이 어떤 말을 하던, 어떤 실수를 하던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존재합니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은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 없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밥을 굶을지언정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인간의 사랑으로 채우려 하기 때문에 실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방향을 바꾸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샘물이 흘러넘치는 것 같은 감동과 치유와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나무는 물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물 없는 사막과 같습니다. 나무 없는 산과 같고 지붕 없는 집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실수와 허물까지 받아들이고, 죄까지 용납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다릅니다. 인간의 사랑은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삶의 기록이요 언어의 기록입니다. 진정으로 배신당하고 싶지 않습니까?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까? 참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예수님의 생각, 마음을 품으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축복이 옵니다. 모든 성도는 악보같은 존재 지금까지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 4~8절에서 사랑의 성품 15가지를 공부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고,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고린도전서 13장 13절입니다.‘언제까지나 남아 있다’는 말은 ‘한 가지도 빠지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고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심포니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들 날 무시하는데… ’, ‘나 한 사람이야 뭐…’하며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없으면 안 됩니다. ‘나는 소중하다’, ‘빠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말씀하십시오. 자리를 붙들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사람입니다.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내가 보기에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빠지면 안 됩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라는 말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 위에 사랑을 세워라. 소망 위에 사랑을 세워라. 사랑 위에 사랑을 세워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하나도 빠지면 안 되듯이
주여,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그런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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