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새벽지기1 2019. 8. 5. 07:48


오늘은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그룹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다섯 가지 사랑  


고린도전서 13장 7~8절에 보면 사랑에 대한 다섯 가지 메시지가 나옵니다.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고전 13:7~8)


첫째, 사랑은 모든 허물과 실수와 죄를 다 덮어 줍니다.

사랑에는 우리의 허물과 죄와 실수를 보혈의 피로 깨끗이 덮어 주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의 특징은 덮어 주는 것입니다. 자꾸 드러내고 약점과 단점을 찾고, 아픈 부분을 파헤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죄와 허물을 다 드러내야 사람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덮어 줘야 변합니다. 드러내면 상처, 한, 분노, 복수심만 생깁니다. 그래서 될 일도 안 되고 나중에는 깊은 상처를 안고 분노에 살인 의식까지 갖게 됩니다. 


둘째,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조건 없이 믿게 합니다. 지금은 실수하고, 실패하고, 자격이 없고, 형편없지만 사랑하면 격려해 주고 믿어 줍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 줍니다. 절망에서 승리로 뛰어나올 수 있다고 믿어 줍니다. 

셋째, 사랑은 그 사람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줍니다.

“너는 할 수 있다. 해 봐라. 괜찮다. 절망하지 마라. 좌절하지 마라. 열등감에 빠지지 마라. 돌아서지 마라. 끝까지 해 봐라.”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넷째,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이것은 올림픽에서 마라톤 선수가 끝까지 완주하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클라이맥스 같은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이 우리에게 능력을 줍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요점입니다.  


분열되는 고린도교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왜 이런 글을 썼을까요?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세워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음행을 행하고 파벌을 만들어서 심각하게 싸움을 했습니다. 저는 고린도전서 1장부터 12장까지 말씀을 보면서 ‘아, 이런 교회라면 반드시 싸우고 헤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제일 마음 아픈 사건은 서로 싸우고 교회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갈라지는 교회를 보면 장로는 목사에게 세상에서 할 수 없는 심한 말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판을 하고, 목사는 앞에서 공격을 못하니까 뒤에서 말을 만들어  장로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법정까지 가서 싸웁니다. 이런 일들이 요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지상의 교회에는 항상 갈등이 있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지상에 없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다 하더라도 자꾸 싸우듯이 이 지상의 교회는 흠이 많고 싸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천상의 교회는 완벽합니다. 죄도 없고, 이기심도 없고, 절망도 없고, 질투도 없는 우리가 꿈꾸는 교회가 천국에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문제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파벌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파벌이 있으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교회에 등록한 시기에 따라, 출신 지역에 따라, 출신 학교에 따라 편을 가르고 싸움을 합니다. 파벌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은 없고 ‘누구 편인가’만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최고다. 바울이 나한테 세례 줬다. 나는 바울파다”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게바(베드로)파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바울과 베드로는 싸우지 않았지만 고린도교인들끼리 파벌을 만들어 열심히 싸웠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아볼로파다”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는 학자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학구파냐, 행동파냐,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 파벌을 만들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파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도 게바도 아볼로도 다 싫다. 나는 예수파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교파 저런 교파 다 싫으니 교파 없는 교파를 만든 것입니다. 그럼 그곳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문제는 똑같이 있습니다.  


문제는 있고 해답은 없다  


둘째, 고린도교회에 음행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5장 1절을 보면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동거하는 사건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문제가 있으면 출교를 시킨다든지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데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음행이 교회 안에 공공연하게 용납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점점 안으로 썩어가는 것입니다. 음행은 요즘도 교회 분열의 중요한 주제곡입니다. 마치 어느 한 부분이 아프면 다른 곳도 아프듯이 음행이 있으면 부도덕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집니다. 고린도전서 5장 10절을 보면 음행뿐만 아니라 탐욕, 약탈, 중상모략, 우상숭배 등 여러 문제가 많았습니다. 교회에 음행만 일어나도 말이 많고 시끄러울 텐데 교인들 전체가 이렇게 부도덕하고 더러운 일을 쉬쉬하면서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소송을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사이의 문제는 웬만하면 법정까지 가지 않고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께 그 문제에 대해 지도를 받고 그분들의 영적 권위에 따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린도교회는 소송을 해서 세상 법정에 가서 재판관에게 수치를 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넷째, 우상숭배를 위해 바친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놓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원래 싸우는 집은 시시한 문제를 놓고도 심하게 싸웁니다. 싸우지 않는 집은 지혜롭게 그 문제를 해결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런 문제만 보더라도 오늘날 서울로 데리고 와도 아마 문제가 많기로 소문난 교회가 될 것 같습니다. 


또 고린도교회는 어린 교회라 은사 문제로도 많이 다투었습니다. 누가 은사를 제일 많이 받았느냐, 누가 가장 영적이냐를 놓고 경쟁했습니다. 사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신앙이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 예언이 먼저다, 믿음이 먼저다 다툽니다. 이런 문제가 교회에만 있겠습니까? 집안에도 이런 문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을 들어보면 다 일리가 있는데 해답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법은 ‘사랑’  


이런 문제들을 사도 바울이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만!”이라고 말합니다. “싸우는 것을 멈추라. 하나님의 말씀, 사랑으로 돌아오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분열이 있는 곳에, 파벌이 있는 곳에, 음행이 있는 곳에, 부도덕한 곳에, 소송이 있는 곳에, 우상숭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만병통치약이다. 사랑을 품게 되면 모든 문제들이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랑은 치유와 회복, 일치와 연합, 순결과 도덕, 화해와 신뢰를 준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근본적으로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15가지 사랑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멈추고 사랑으로 덮으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덮으십시오. 덮으면 치료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비판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덮으면 문제가 그대로 있지 않느냐? 누가 문제를 해결하느냐?”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악했던 사람이, 그렇게 형편없던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던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마음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시오.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는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습니다  


7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 13:7) 첫째, 모든 것을 덮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도 아니고 설득력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허물도 덮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법원에 가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열, 파벌, 분단, 부도덕, 우상숭배, 소송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해답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그 죄가 씻겨진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 영에 교활함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시 32:1~2) 저는 여러분의 죄와 허물이 다 덮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 숨겨진 죄악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 드러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를 보십시오. 그들이 범죄한 이후에 부끄러움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지어 입었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담과 이브가 만든 옷을 벗겨버리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이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을 보시고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여인을 보호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요 8:7) 그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돌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 8:11)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았다면 이 여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노숙자처럼 냄새나는 그 한 여인을 보호하시고, 격려하시고,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갓 태어나셨을 때 예수님을 보호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지만 마구간과 강보가 있었습니다. 탕자에게는 아버지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가 지은 죄와 상관없이 용서, 환영, 보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고 그 냄새나는 아들을 껴안고 반지를 끼워 주고 음식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랍니다  


둘째, ‘모든 것을 믿는다’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합니다. 사랑은 믿음을 심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을 신뢰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죄를 짓고 실수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도록, 다시 회복되도록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을 믿어 주셨기 때문에 구원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요 3:16)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12제자 중 가장 실수가 많은 제자는 누굴까요? 베드로입니다.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베드로는 기복이 심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이라고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베드로를 믿어 주셨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수제자가 되고 초대교회의 리더십이 되고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죄를 덮어 주고 그 사람을 믿어 주고 그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면 그렇게 됩니다.


셋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희망을 줍니다. 노아에게는 홍수 이후에 땅이 말랐는지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를 보냅니다. 오랜 시간 이후에 비둘기는 잎사귀 하나를 물고 옵니다. 이 잎사귀는 희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홍수는 지나갔고 땅이 말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그것이 희망의 씨앗, 희망의 잎사귀입니다. 계속 학교에서 낙제하고 떨어지고 쫓겨나고 도저히 길이 없다고 할지라도 “지금부터 다시 하자”고 희망을 주십시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이 노아의 잎사귀와 같은 희망을 주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도 다시 눈을 깜빡이며 살아야 된다고 생각을 바꿉니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희망의 사랑을 나누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사랑을 나누지 않겠습니까? 어떤 허물과 죄도 다 용서해 주는 그런 사랑을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영원합니다  


넷째,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게 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위기에 부딪칩니다. 절망에 빠지거나, 불가능 앞에 서게 되거나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고 중도에 하차하고 싶은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포기했다면 우리의 구원이 어찌 됐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십자가를 보십시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끝까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또 속아 주고 참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고전 13:8) 사랑은 예언보다, 방언보다, 지식보다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지지만 영원히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집도, 자동차도, 직장도, 좋아하던 모든 것도 사라지지만 여러분 안에 있는 사랑만 남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요일 4:10)  여호와께서 오래전에 우리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했기에 내가 인애로 너를 이끌었다.”(렘 31:3) 


저는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실습을 해 보고 싶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8절까지 ‘사랑’이란 말 대신에 ‘나(자기 이름)’라는 말을 한번 넣어 읽어 보십시오. 끝까지 읽으신 분들은 참 훌륭한 분들이십니다. 이번에는 ‘사랑’이란 말 대신에 ‘예수님’이라는 말을 넣어 읽어보십시오. ‘나(자기 이름)’라는 말을 넣고 읽을 때는 전혀 읽혀지지 않습니다. 입술만 움직일 뿐 마음에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말을 넣어 읽어보니까 ‘맞아, 맞아, 이 분이 예수님이야’라고 말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라는 말을 넣어 읽어 보십시오.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이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 정리 : 서철 차장 chol@onnuri.or.kr 일러스트레이션 최정훈/www.illustschool.co.kr




'좋은 말씀 > 하용조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숙한 사랑  (0) 2019.08.20
완전한 사랑  (0) 2019.08.12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0) 2019.08.01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0) 2019.07.17
사랑의 교향곡  (0) 2019.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