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교향곡’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사랑의 서론 세 가지를 보았습니다. 첫째,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가 만일 사람의 언어와 천사들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울리는 징이나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다’입니다. 어떤 분은 말을 기가 막히게 잘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결국 자기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듣기는 좋은데 배려, 관심, 사랑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그냥 울리는 징, 소리나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둘째,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가 만일 예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입니다. 셋째,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가 만일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남을 돕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나는 아무 소용이 없다’입니다.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고 밤잠 못 자면서 평생 일구어 놓은 일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네게 사랑이 없으면’ 이 아니라 ‘내게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것을 주목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외웠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고 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포인트는 ‘내게 사랑이 없으면’입니다. 정말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영적인 지식, 유산들이 다 헛것이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오늘부터 본론이 시작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고전 13:4~ 8)
이 말씀을 보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 15가지가 나옵니다. 이것은 세 그룹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첫째 그룹에 속한 다섯 가지 사랑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4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고전 13:4) 이 말씀은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등 다섯 가지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화를 더디 내시고 사랑이 넘쳐나는 분이시다. (시 103:8)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말 중에 가장 훌륭한 말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시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화를 더디 내시는 분,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사랑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의 의미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 4절은 이런 사랑의 본질, 성격을 이야기 하면서 제일 처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급하게, 빨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열정적으로 사랑을 빨리, 급하게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진면목은 끝없이 기다리고 참는데 있습니다. ‘참는다’는 말에 ‘기다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왕에게 빚을 진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주인이 끝까지 참고 기다려 준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립니다. 어머니는 해산을 할 때까지 10개월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기다림은 성숙입니다.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한 여자를, 한 남자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럽고,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끝까지 품어주고 변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기다림입니다.‘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것은 화를 더디 낸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디 내는 것입니다. 내 기준에 맞지 않고, 내 방법대로 하지 않고,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화가 납니까. 하지만 사랑한다면 오늘 화를 낼 것을 내일 내고, 내일 화를 낼 것을 모레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조금씩 실천해 보십시오. 사랑에는 분노가 없습니다. 그러나 미움에는 분노가 있습니다. 분노는 죄의 속성입니다. 분노를 가지게 되면 화가 폭발합니다. 화가 폭발하면 사랑은 유리 조각처럼 다 깨져버립니다. 끝까지 자기를 절제하고 통제하십시오. 사랑은 자기절제입니다. 사랑은 자기포기입니다. 통제입니다. 잠깐 절제하고, 잠깐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수십 년을 절제하고 통제함으로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절제는 아름다운 것이요, 성숙한 것이요, 열매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래 참음에 담긴 의미입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둘째, 사랑은 친절합니다. ‘친절하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따뜻하고 소박한 작은 사랑입니다. 위대한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작은 사랑, 없어도 되는 사랑,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나누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우리는 너무 위대한 사랑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큰일을 해야 되고, 비전을 만들어야 되고, 리더십이 있어야 되고, 팀워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리더십 세미나, 비전 세미나, 팀워크 세미나 등 이런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친절 세미나’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세미나는 없습니다. 하는 사람도 없고 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대부분의 기적은 소박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너무 위대하게 봤을 뿐,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 실수를 감싸주시면서 따뜻하게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를 들어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곳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결혼식에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결혼식에 가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결혼식에 가셔서 축복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혼주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여러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꼭 하십시오. 병원에 심방 가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심방을 가면 환자는 굉장히 따뜻한 사랑을 느낍니다. ‘아, 이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것이 친절입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께 갔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이 나타나서 병이 치유됐습니다. 이 여자가 무엇을 느꼈을까요? ‘예수님같이 위대하고 훌륭하고 바쁘신 분이 어떻게 나 같이 병든 여자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생각해 주실까?’ 여기에 찡한 눈물이 있습니다. 그 눈물이 그 여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에 “사랑하는 딸아”라고 불러주십니다. 이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모두 다 이렇게 소박합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언저리 사랑’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삭개오를 보고 지나쳐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고 “오늘 나는 네 집에서 하룻밤 자야 되겠다.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무시해도 되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관심가지지 않아도 되고, 무시해도 되는 사람을 찾아가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나눌 때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그런 소박하고 작은 일, 없어도 되는 일들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친절이 가득 담긴 말씀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 우리 마음이 왜 삭막할까요? 친절이 없기 때문에, 친절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의무와 형식과 강박관념만 있지 사랑의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잠언 말씀을 보겠습니다. 화내는 것이 무섭고 진노가 폭풍 같다지만 질투 앞에 누가 당해 낼 수 있겠는가?(잠 27:4) 화를 내는 것보다도 진노하는 것보다도 질투가 더 무섭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 어디서 오며 다툼이 어디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 속에 있는 싸우는 정욕에서 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욕심을 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투고 싸우지만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약 4:1~2) 질투보다 더 무서운 감정은 없습니다. 질투란 강렬하게 불거지는 것입니다. 질투의 감정에 한번 사로잡히면 여러분의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집니다. 질투의 예가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 이야기입니다. 형들은 처음에는 요셉을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 더 발전하니까 경쟁심으로 바뀌었고, 경쟁심은 시기심이 되어 드디어 요셉을 깊은 우물 구덩이에 던져 애굽 사람에게 팔게 만들었습니다. 그 모든 일을 한 것이 시기입니다. 시기는 가만히 두면 계속 커집니다. 혹시 여러분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가 생기거든 빨리 꺼버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은 여러분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기와 질투가 많았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쁜 사람으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아주 못 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굉장히 착한 종교인들입니다. 율법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에게 시기와 질투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질투를 끄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십자가까지 가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는 분노와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아예 없을 수는 없습니다. 분노, 시기, 질투가 생길 때마다 얼른 그 불을 꺼버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은 무섭게 변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직장을 불태울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제 안에도 이런 고약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크고 좋기 때문에 질투하시는 분들이 참 많은데 그런 질투를 받으면 웬일인지 신이 나고 좋습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도 교회가 크다, 목회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남들이 질투하면 저도 모르게 그것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이 불을 끄지 않으면 저는 망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어서 참 감사합니다. 제게는 그런 기회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초정해 주거나 알아주면 저도 모르게 좋습니다. 그것을 지금 미리 끄지 않으면 그것은 질투로 변할 것이고, 우리 교회보다 더 큰 교회, 저보다 더 목회를 잘하는 분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여러분은 각자 자기 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빌 2:3~8)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에게는 진정한 포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듬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기득권, 삶의 기득권, 자리의 기득권, 존재의 기득권만 포기할 수 있어도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셋째,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었습니다. 넷째,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결혼 잔치에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마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초대받았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너와 그 사람을 모두 초대한 그 주인이 다가와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면서 끝자리로 내려가 앉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받으면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주인이 와서 ‘친구여, 이리 올라와 더 나은 자리에 앉으시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모든 손님들 앞에서 네가 높아질 것이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4:8~11) 사랑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사랑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인내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산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저 사람은 예수 같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해도 ‘어, 마음이 따뜻하네. 그래. 상처를 딛고 다시 한 번 일어나볼까?’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는 상상할 수 없는 따뜻한 마음이 살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서 ‘직업을 버리고 선교사로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줘 주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당신의 몸을 불 사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랑은 소박합니다. 잠깐 참아 주고, 화 내지 않고, 기다려주고, 가지 않아도 되는 곳에 가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우리 마음속에 작은 사랑의 불꽃이 번지게 도와주옵소서.
큰 사랑, 큰 헌신은 못하지만 작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좋은 말씀 > 하용조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0) | 2019.08.05 |
---|---|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0) | 2019.08.01 |
사랑의 교향곡 (0) | 2019.07.04 |
비전을 다시 생각한다 (0) | 2019.07.02 |
예수님께서 주신 비전과 사명 (0) | 2019.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