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은 흔히 ‘사랑장’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달리 기독교적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개념과 달리 기독교적인 사랑은 독특합니다. 특별히 4절~8절은 사랑의 성격과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바울의 사랑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인가’보다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명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계명이다. 그리고 둘째 계명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마 22:37~40)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마음과 뜻과 정성,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굉장히 간결하고 쉬우면서도 심오한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도 해 주셨습니다.(눅 10:30~ 35) 이 비유의 핵심은 ‘누가 사랑의 대상인가’입니다. 강도 만난 이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었던 사마리아인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즉 사랑의 대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사도 바울은 사랑의 본질, 사랑의 성격에 대해 매우 간결하면서도 기독교적 진리의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부터 8절까지 보면 사랑에 대한 15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5가지씩 5그룹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5가지 사랑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친절하고,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메시지는 5절~6절입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5~6)
이 말씀에도 사랑에 대한 5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몸소 행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가만히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절대로 무례하게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싶으실 때 반드시 노크를 하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드려야 들어오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예수님은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노크도 안 하고 확 들어오면 얼마나 기분 나쁘고 당황스럽습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내가 너한테 들어가도 되겠니?”하고 노크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굉장히 정중하게 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정중하게 대해 주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사랑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함부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병들었을 때, 외로울 때, 배고플 때, 귀신들렸을 때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 병을 고쳐주십니다. 구원부터 얘기하지 않으십니다. 병부터 고쳐주십니다. 친구가 되어 주시고 배불리 먹여주십니다. 귀신을 쫓아 주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함부로 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해주면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것 자체가 감동이요 눈물이 나는 일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다루는데 예수님은 나를 함부로 대하시지 않고 정중하게 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풍랑의 위기 앞에 있을 때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바람을 잔잔케 하시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상대방을 높이십시오
세상적인 사랑은 어떻습니까? 무례하고 지배적이고 폭력적이고 공격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굉장히 위대한 사랑이라고 자만합니다. 함부로 반말을 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 중에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특히 남자는 여자를 폭력으로 다루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먹을 쥐지 말고 쓰다듬어 주십시오.
제가 이번에 수술하고 나서 바뀐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내에게 “그렇습니까? 저렇습니까? 물 한 그릇 주시겠습니까?”라고 존댓말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존댓말을 하는 것이 좀 어색하고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존댓말을 하다 보니 아내가 정말로 존경스러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아내도 저에게 예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굉장히 깜짝 놀랐습니다. 가능하면 상대방에게 예를 갖추십시오. 남편에게 “오빠, 오빠”하면서 함부로 하지 말고 예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예는 인격입니다.
제가 이번 일본에 가서 장재윤 목사님으로부터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40대 되는 스즈키상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이 분이 말을 거칠게 해서 남한테 상처를 많이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큐티를 하다가 ‘내가 이제 말을 거칠게 하면 안되겠다. 손님한테 잘 해야 되겠다’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 분의 직업이 고객들의 불평불만을 들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불평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와서 2시간 동안 일도 못하게 하고 화를 내며 불평을 했답니다. 이 스즈키상이 큐티를 하면서 ‘오늘은 온유해야 되겠다, 무례히 행치 않겠다’고 하나님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불평을 2시간 동안 들었답니다. 갈 듯 싶다가도 돌아와서 화를 내고,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해도 2시간 동안 꾹 참고 아주 정중하게 대해서 보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나중에 가면서 “미안하다”고 그러더랍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본사에서 연락이 왔답니다. 어떤 사람이 본부책임자에게 전화를 해서 “당신 회사 지점에 기막힌 사람이 하나 있다. 그 사람을 보면서 내가 감동을 받았다. 그 사람을 칭찬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 스즈키상이 그 다음날로 본부로 발령이 났답니다. 이것이 바로 무례히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축복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둘째, 사랑은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자기중심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대적하는 이유가 뭘까요? 왜 그렇게 화를 내고 함부로 대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왜 욕심이 생깁니까? 이기심 때문입니다. 세상이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 공격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한 번도 자기의 의견을 내놓지 않고 묵묵히 순종만 합니다. 그런 분은 얼마나 존경스럽습니까. 그렇게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내 편을 만들기 위해서, 땅 한 평이라도 더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 화를 내고 싸우고 경쟁을 합니다. 사고가 나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욕심이 과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저명인사들이 어린이를 성추행하기도 합니다. 이기심, 욕심, 정욕 때문입니다. 사창가가 번성하고 술집이 곳곳에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 이기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여러분은 각자 자기 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십시오.” (빌 2:3~4)
이 성경 말씀에 줄을 치고 곰곰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좋아할까요? 예수님의 말과 행동, 기적 속에서 이기심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하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병자들을 위해서, 귀신들린 자들을 위해서, 외로운 자들을 위해서 일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기심을 포기하십시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찾아 올 것입니다. 누구나 여러분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셋째, 사랑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늘 화가 문제입니다. 화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화를 내고 후회하고, 또 화를 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희로애락(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좋아하는)을 느낍니다. 이런 감정 그 자체를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감정은 그냥 감정입니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감정은 죄와 상관없이 그냥 기뻐하는 것이고 그냥 슬퍼하는 것이고 그냥 분노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화를 내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죄로 변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화가 변하면 분노가 되고, 분노는 죄를 부릅니다.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화를 품지 말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 4:26~27)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꼭 해가 지면 우리 어머니한테 가서 “여보 미안해. 화 풉시다. 성경에 해가 지도록 화 품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냥 날 용서하구려. 허허”라고 하십니다. 어머니 골탕 먹여놓고, 화나게 해 놓고 성경구절 갖다 딱 내면서 이제 화 풀자 그러는 것입니다. 제가 그걸 보면서 ‘우리 아버지가 참 약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그런 것을 보고 자라니까 제가 배운 것 같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하루를 넘기지 않습니다. 화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냥 감정입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냥 느껴지는데 어쩌겠습니까. 화가 나면 화를 내야죠. 왜 화가 날까요? 거절감, 상처, 억울한 누명을 쓴 경험이나 불의한 일을 겪은 경험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경우를 만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랑이 있는 사람은 화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빠졌다 할지라도 금방 빠져나옵니다. 빨리 빠져나오면 나중에 화를 낼 일이 생겨도 화를 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 사람들이 ‘저 사람 변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을 품지 않습니다
넷째, 사랑은 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화를 내면서도 죄를 짓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원한을 품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원한을 품고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내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이혼을 당한 사람, 폭력을 행한 사람, 사업을 망가뜨린 사람,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 애써 보증을 서줬더니 도망가 버린 사람, 나에게 모욕을 주고 상처를 준 사람, 나의 인간관계를 다 빼앗아버린 사람 등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쉽게 용서하겠습니까.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인종차별, 성차별 등이 있습니다.
이 분노, 원한, 상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묵상하면 할수록 상처가 깊어집니다. 용서하기 힘든 사람, 미워하는 사람을 잊어버리면 간단한데 매일 그 사람을 자기 눈앞에 두고 씩씩거리며 화를 냅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분노가 커지고 상처도 커집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내가 준 상처는 잊어버리고 내가 받은 상처만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은 내가 사랑하면 화, 분노, 상처가 소리 없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 중에 해석이 좀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도 용서해 주소서.”(마 6:12)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적이 없는데 언제, 어떻게 우리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부분이 매우 갈등을 줍니다. 이 말씀의 정확한 해석은 ‘용서를 받는 것과 용서를 하는 일은 동시적이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죄를 용서받은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은 경험이 없거나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여러분, 우리 감정은 변합니다. 감정을 따라 살면 인생이 변화무쌍합니다. 갰다 흐렸다 아주 복잡합니다. 말도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합니다. 감정을 따라 살면 위기를 맞게 돼 있습니다. 비인격자라는 말을 듣게 돼 있습니다. 감정은 변하지만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기준으로 삼고 살면 그 사람은 틀림없는 인격으로 변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랑은 죄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남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남이 잘못한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거짓말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탄이 승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법이 이기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악이 판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정직과 함께 기뻐하고 의로운 것을 좋아하고 남의 행복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오늘 5가지 사랑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결코 간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오늘 당장이라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셔서 오늘부터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감정이 아니라 진리로 사랑하십시오. 불의를 기뻐하지 마십시오. 진리에 내 인생의 닻을 거십시오. 내 감정은 쓰고 복잡하고 싫어도 진리를 따라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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