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완전한 사랑

새벽지기1 2019. 8. 12. 06:58


오늘 설교 제목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완전한 사랑과 불완전한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흠과 티가 없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순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원까지 가는 사랑이요, 변함이 없는 사랑이요, 진실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인간은 늘 완전한 사랑을 노래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게 하려고 해도 흠이 있고 티가 있고 부족합니다. 순간적이고 변덕이 심하고 진실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  


국어에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다양하지 않지만 헬라어나 영어는 상황에 따라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랑이 순수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첫째, 동물적 사랑(에로스)입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사랑, 본능적인 사랑, 성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본능적인 사랑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며 짐승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또 개띠, 소띠, 말띠 등 사람을 동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산이나 절에 가면 무서운 동물의 얼굴을 조각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그런 동물적인 야망, 본능, 성욕이 있습니다. 

둘째는 이런 동물적인 사랑보다 고상하고 순결한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랑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을 동물처럼 취급한다면 그 사람은 동물적인 사랑을 할 것이고,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본다면 그 사람은 인격적인 사랑을 할 것입니다. 이 인격적인 사랑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정(필리아)입니다. 이 단어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가 만났을 때 대화에서 등장합니다(요 21:15~17).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쓰셨던 단어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아가페라는 단어 대신 필리아를 썼습니다. “내가 당신을 우정으로, 친구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두 번째 물으셨을 때도 베드로가 필리아로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물으실 때 필리아로 물으셨습니다. 이것처럼 필리아는 매우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의 다른 하나는 부모의 사랑(스토르게)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 같습니다. 무조건적이고 무한하고 희생적입니다. 이 사랑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셋째,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는 절대 다른 단어를 쓰지 않고 ‘아카페’라는 단어만 씁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 거저 주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 포기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령님을 힘입어 우리도 이 사랑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내기만 해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회복이 일어나고 축복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영원한 사랑인 아가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 속에 이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과 본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앞서 세 번에 나눠 15가지로 말씀드린 이 사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도 할 수 있다, 인간도 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인간은 흉내를 낼 뿐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을 온전히 이루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 참다 맙니다. 간혹 오래 기다리고 참는다 해도 허무주의적인 실존을 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친절합니다. 상대방이 실수를 하더라도 끊임없이 웃고 또 웃습니다.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매일 이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한순간만이라도 이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나를 때려도 나는 기다릴 거고, 참을 거고, 친절할 거고, 네가 어떤 욕을 해도 나는 흥분하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이 담긴 표정을 한번 지어보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만약 2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얼굴은 아마 이런 표정이셨을 것입니다.  


‘아가페’ 보여주신 예수님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이 말 속에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언어를 보면 하실 말씀을 다 하시면서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심이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유익을 구하시지 않았고, 성내시지 않았고, 원한을 품으시지 않았고, 불의를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예전 설교를 다시 읽으면서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이란 말이 얼마나 좋은지 다시 깨달았습니다. 우리 사랑에는 거짓이 너무 많습니다. 불법이 너무 많습니다. 또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여기까지 오니까 저는 숨도 잘 못 쉬겠습니다. 저는 이것과 반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흉내 내보고 애를 쓰지만 안 됩니다. 여러분, 제가 화를 잘 안 낼 것 같습니까? 겉으로는 안 그래도 속으로는 화를 잘 냅니다. 표현을 안 할 뿐입니다. 노력은 하지만 잘 안됩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걸 하셨을까?’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고전 13:8) 예언은 소중합니다. 예언은 미래의 열쇠입니다. 그러나 결국 종말이 오면, 마지막 때가 되면 예언은 다 성취됩니다. 예언의 역할이 끝나는 것입니다. 방언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천국이 오면 천국 방언이 있는데 세상 방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식은 훌륭한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에서 세상의 지식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영원까지 이어지는 사랑 그렇다면 영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은 현재에도 필요하고 미래에도 필요하고 영원까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저를 돌아봤습니다. 20년이 넘게 온누리교회를 섬겨 오면서 요즘 후회하고 회개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저도 모르게 교회가 크게 성장했지만 제가 교인 한 명 한 명을 돌봤는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우리 교인이 왜 울고 있는지, 우리 교인들이 왜 어려워하고 있는지 돌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시간이 없고 건강이 없어서 못했다면 다른 분에게 부탁을 해서라도 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제가 살아야 할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 적기 때문에 교인들을 만나주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한 것이 두렵습니다. 교회 초창기에는 교인들과 잘 지냈습니다. 밥도 같이 먹고 집에도 오가면서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점점 커지니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네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못했니?’ 아닙니다. 제게 그런데 마음이 없어서, 사랑이 없어서 못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기억나지 않았는데 요즘은 병들고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꾸 기억납니다. 얼마 전에 한 성도를 심방했습니다. 서울에서 미국에서 여러 번 이분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했었는데 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은 제가 투석을 받아 몹시 힘들어서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장로님과 목사님과 함께 그분을 심방하러 갔습니다. 그날 그분이 천사같이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병을 설명하는데 “이제 마지막 수술인 것 같다. 그리고 장기가 붙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하나님 나라에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병과 싸우면서 자기가 죽을 것을 알면서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그날 제가 힘들기는 했지만 심방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케 하는 사랑  지금 제 마음 속에 또 생각나는 분이 박우형 장로님입니다. 최근에 장로님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몸이 불편하신데 어떻게 사시는지, 누가 밥을 먹여주는지, 누가 몸을 닦아 주는지, 누가 청소를 해주는지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랑이 참 부족하구나. 사람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구나.’ 고린도전서 말씀에 비추어 보면 교회 성장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유명해지는 것도, 부유해지는 것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언, 방언은 다 부분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것뿐입니다.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다 헛것입니다. 어느 날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설교가 지극히 작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웠습니다. 제 사랑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생각에 저는 가끔 설교를 준비하다가 준비를 하지 못하고 가만히 묵상을 하며 기도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고전 13:9~10)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부분적으로 방언합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알던 것은 다 사라집니다. 여기서 완전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부분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 이외의 모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했다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다 헛것입니다.  


행복한 삶의 조건  


저는 목회에 있어서 완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부분적인 것은 쉽습니다. 건물, 의자, 성도 숫자, 조직, 시스템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큐티, 일대일, 공동체, 순도 다 부분적인 것입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Acts29, 2천/1만 비전, 러브소나타, 비전교회, CGNTV, 두란노 등도 다 오늘 말씀에 비춰보면 부분적인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라질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 부분적인 것이 완전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이라는 아교가 들어가야 합니다. 큐티를 하면 거기에 눈물의 사랑이 있고, 성도들의 겸손이 있고, 친절이 있고, 기다림 있고,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큐티만 잘한다고 큐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대일만 잘한다고 일대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대일, 큐티, 러브소나타가 지나간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이 남아야 합니다. 러브소나타도 그렇습니다. “와, 한국 성도들이 자기 돈으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죽도록 고생하고 가는 구나.” 일본사람들이 이런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하고 사는 모든 것에 사랑이 묻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 모든 것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이 들어가야 완전한 것이 됩니다. 우리의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자동차, 직업, 유명세가 있다고 가족이 행복합니까? 결혼의 조건이 화려하면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이 있을 때 그 가정은 행복해 집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GNP가 올라가고 각종 경제 지표가 좋아져야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심장에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정치에도 사랑이 필요하고, 교육에도 사랑이 필요하고, 경영에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건강한 국가는 그것을 고민합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제가 어제 설교준비를 다 끝내놓고 CGNTV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평화방송에서 돌아가신 교황 요한 23세에 대한 방송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젊었을 때 불가리아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아무도 가지 않는 가장 가난하고 형편없는 교구였고, 사람도 주교와 그를 돕는 보좌 신부 딱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교회 운영비, 월급이 제대로 바티칸에서 공급되지 않는 곳인데 이분이 부임을 하자마자 그곳에 지진이 났습니다. 주교는 팔을 걷어붙이고 빵을 구워 배고픈 사람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지역은 러시아 정교회가 지배하는 구역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신부가 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신랄하게 공격하고 빵을 거부하고 돌로 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교회 신부와 이 가톨릭 주교가 둘이 서로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얼굴표정이 다 험악했습니다. 이쪽에는 정교회 신도들이 있고 저쪽에는 가톨릭 신도들이 있어서 일촉즉발이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주교가 가슴에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정교회 신부도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었고 결국 둘이 서로 껴안았습니다. 그래서 빵을 나눠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바티칸에 허락도 안 받고 지진으로 부서진 정교회 교회건물도 지어주었습니다. 이 일로 그분은 또 그 교구에서 쫓겨납니다. 그분이 나중에 교황이 됐다는 이야기입니다.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분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은 평화였습니다. 전쟁을 없애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했습니다. 저는 이분이 가톨릭, 바티칸보다 예수님의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교회보다 정말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제자라는 이유로 이 작은 사람들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마 10:42)“ 왕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여러분 양심에 질문하십시오. 그리고 사랑에 부끄러움이 없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 서철 차장 chol@onnuri.or.kr/ 일러스트 : 최정훈 www.illustscho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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