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제는 ‘성숙한 사랑’입니다. 성숙하다는 말은 ‘무르익었다’는 뜻입니다. 8월 대보름의 보름달처럼 꽉 찬 것을 말합니다. 성숙한 사람과 이야기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겸손을 느낄 것입니다. 겸손뿐만 아니라 지혜와 통찰력이 드러납니다. 그와 이야기하면 모든 것이 확실해지고 분명해지며 쉬워집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 곁에는 자꾸 가고 싶어집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 보면 답답합니다. 한 말을 반복해서 또 하게 됩니다. 일이 자꾸 꼬이고 열매가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미숙함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잘 못 된 것이 아니라 미숙한 것입니다. 미숙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사랑이고 불완전한 사랑이 인간에게 속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성숙한 사랑은 타인에게 덕을 끼칩니다. 미숙한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칩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린아이의 사랑_ 미숙함
오늘 본문에는 성숙한 사랑과 미숙한 사랑에 대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비유이고, 두 번째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은 희미한 것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 같은 비유이며, 세 번째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과 온전히 아는 것의 비유입니다. 먼저 어린아이와 어른의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린 아이같이 말하고 어린아이같이 이해하고 어린아이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돼서는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렸습니다.(고전 13:11) 일반적으로 어린아이 때는 철이 없고 성숙하지 않고 지혜가 부족합니다. 본문에 어린아이였을 때는 첫 번째 어린아이같이 말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떻습니까? 우선 항상 응석을 부리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떼를 쓰고 자기주장만 계속 되풀이합니다. 작은 일에 쉽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릅니다. 또한 어린아이는 단어력이 아주 부족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문장에는 상상력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언어 수준의 밖에 있는 이야기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두 번째 어린아이같이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세계관은 아주 단순합니다. 단순하게 이해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말합니다. 어린아이의 세계는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 안에서만 삽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항상 자기중심적이고 떼쓰고 응석부리고, 자기 주장만하고 남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데 무슨 사랑이 생기겠습니까? 사랑은 사랑인데 그런 사랑은 아주 골치 아픈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어른아이같이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말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생각을 낳습니다. 어린아이는 지혜와 통찰력이 없고, 생각의 깊이와 넓이, 높이도 없습니다. 앞뒤를 계산하지 않고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미숙한 사랑은 어린아이의 사랑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른의 사랑_ 배려와 경청
반대로 성숙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의 사랑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어른은 성숙하고 굉장히 훈련된 그런 어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른의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른은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표현력이 풍부하고 의사소통을 할 줄 압니다. 언어의 상상력이 있습니다. 말을 한다고 해서 다 언어가 아닙니다. 어렸을 때는 그냥 말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그 언어의 소리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상상력이 붙어서 전달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시가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전달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도 어른의 특징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자기 것만 챙기고 가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을 강요합니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사랑을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또한 어른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합니다. 최근에 <배려>라는 책과 <경청>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경청의 기술과 배려의 기술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랑, 이것도 성숙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우리를 배려하신지 아십니까? 우리가 상처받을까봐, 힘들까봐 세심하게 배려하십니다. 예수님은 약자, 병든 자, 힘없는 자를 배려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십니다. 결국 타인을 보살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신학교 다닐 때 귀에 따갑도록 들은 말이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라’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른의 이해력을 갖습니다. 사리를 분별하고 속 깊은 뜻을 이해합니다. 상대방의 말보다 생각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생각 보다는 의도를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어른은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싸우지도 않습니다. 이해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해력은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이해력이 많으면 세상살이가 편해집니다. 이해가 안 됐을 때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성숙한 사람은 어른의 사고를 합니다. 성숙한 사고는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남을 이해합니다. 생각은 사상을 만들고 사상은 행동을 만듭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거칠지 않고, 남에게 실례를 하거나 손해를 끼치지 않는 사랑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숙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의지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불완전한 내 사랑을 가지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맞대어 보는 사랑
이제 두 번째 비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 상반절만 보겠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것입니다”‘미숙한 사랑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설명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이나 금과 같은 것으로 거울을 만들어서 오늘날의 거울처럼 완벽하게 얼굴을 투사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하지 않고 희미하고, 때로는 막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멀리 있는 것처럼 찌그러지기도 합니다. 미숙한 사랑은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 영상과 같습니다. 그러나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보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본문에서 성숙한 사랑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과 같은 감동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 같은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나의 얼굴을 맞대어 보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태양을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신데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면 우리 눈이 얼마나 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용서하지 못 할 것이 없고, 이해하지 못 할 것이 없고, 받아들이지 못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 껴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생각해 보니까 심하게 냄새 나는 홈리스(homeless)가 있으면 가까이 못가고 비키더라고요. 그 사람들의 냄새를 다 맡고 껴안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껴안기는 껴안는데 지금은 억지로 껴안고 있는 단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껴안아야 합니다. 내 사랑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다 껴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 홈리스뿐이겠습니까? 불편하게 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자꾸 안 만나려고 하고 멀리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껴안아야 합니다. 같이 울어 주고 이해하고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클라이맥스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의 클라이맥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하신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아는 사랑 이제 세 번째 비유입니다. 세 번째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과 온전히 아는 것의 비유입니다. 13장 12절 하반절에서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온전한 지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도 부분적이고 내가 하는 사랑도 전부 부분적입니다. 전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전체적으로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의 극히 일부를 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세계, 요한계시록과 그 후의 천상의 세계에 대한 성경적 지식이 좀 부족합니다. 그래서 깊고 오묘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현재 싸우는 것입니다. 미래를 이해하고 종말을 이해하면 현재의 구원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아는 것이 완전한 지식이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아는 것이 완전한 지식이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아는 것이 더 완전한 지식일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나를 아시듯 내가 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사랑
우리는 미숙한 사랑과 성숙한 사랑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세 가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성숙한 사랑에 해당하는 것만 빼서 보면 ‘어른의 사랑’, ‘얼굴을 맞대어 보는 사랑’, ‘온전히 아는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사랑에 무슨 뜻이 있을까요? 세 가지 뜻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성숙한 사랑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 다윗의 고백처럼 부족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흠과 티가 있고 모자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흠과 티가 없고 모자람이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많다’라는 개념보다 ‘부족함이 없다’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아주 가득 찬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이 우리의 부족함을 다 채웁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모든 분들이 부족함이 없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2장 1절에서 12절 가나의 혼인잔치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저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가나는 시골입니다. 평범한 시골 결혼식에 예수님이 참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는 모임은 다 빼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메시지가 가나의 혼인잔치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이 조용히 포도주를 채워 주십니다.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동이에 물을 갖다 부어라’라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신혼부부가 부끄럽지 않게 해 주십니다. 성숙한 사랑은 위기에서 건져 줍니다.
성숙한 사랑은 남을 도와주는 사랑이요, 어려움을 막아주는 사랑입니다. 충만한 사랑이 드러나는 본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3절~21절에 예수님이 병을 많이 고치셨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모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온 사람들 앞에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어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말을 들으려고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배려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는 배려가 없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는 내가 중요하고, 내 모임이 중요하고, 내 생각, 내 교회만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 사람들이 배고플 것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고 남을 생각하는 예수님의 배려가 드러납니다. 또한 충만한 의미가 있습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흘러넘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회복과 치유, 능력이 있는 사랑
두 번째, 성숙한 사랑은 회복과 치유를 의미합니다. 병들고, 상처 나고, 약한 것들을 고치고 치유하고 강하게 하는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병을 앓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온갖 질병과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 간질병에 걸린 사람들, 중풍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마 4:24) 예수님은 아무리 바쁘셔도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제가 이번에 큰 수술을 하면서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한 줄 아십니까? ‘주님 내가 이 병에서 살아나면 치유 사역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입니다. 그런 비전을 하나님이 자꾸 저에게 주십니다. 저는 20년 동안 말씀 사역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아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도움도 받고, 약의 도움도 받지만 우리 교회에 치유 사역자들이 많이 생겨서 기도의 도움도 받고 살아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치유 사역에 대한 비전을 지금 보여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영혼, 한 영혼 돌봅니다. 교회도 돌보지만 교인을 돌봐야 합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서로서로 돌보면 2분의 1로 줄어들고, 다시 서로서로 돌보면 4분의 1로 줄어듭니다.
세 번째, 성숙한 사랑은 능력이 있습니다. 성숙한 사랑에는 부드러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녹이고 부드럽게 하고 문을 열게 하는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패배를 승리로 바꾸게 하는 용서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 하나를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8절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입니다. 이제 다른 관점에서 읽어보겠습니다. 그냥 읽고 느끼시고 즐기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고전 13:4~8)
예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요, 성숙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믿고 활용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미 여러분 안에 그 사랑을 주셨습니다.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남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남을 배려해 보십시오.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그 사람의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숙한 사랑으로 치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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