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부활10 - 예수의 부활, 영혼구원의 부정 (창세기1:26-28)

새벽지기1 2019. 5. 9. 07:12


저는 앞에서 그리스의 이원론과 영혼구원론이 인류 최대의 거짓이라고 말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좀 거북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부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말인데요,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사실 설교자는 세상살이에 지치고 상처받은 성도들의 마음과 삶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 없이 최대한 사실대로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설교자의 첫 번째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감 없이 사실대로 영혼구원론이 인류 최대의 거짓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영혼구원론이 사악한 거짓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지어낸 새빨간 거짓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지 않은 구원을 말했다는 면에서 명백한 거짓이고, 아주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이 믿고 따랐다는 면에서 인류 최대의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조금만 깊이 읽으면 이원론과 영혼구원론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세계관은 그리스의 이원론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원론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합니다. 성경과 이원론은 절대 양립하지 못합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원론은 하늘은 참 실재이고 땅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은 선하고 땅은 악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은 영원불변하고 땅은 끝없이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은 완전히 다른 세계요 서로 대립한다고 말합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고, 영혼의 감옥인 육체에서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고 말하고, 천지로 이루어진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말합니다(창1:31). 또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땅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고 말합니다(창24: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천지’(天地)입니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바로 ‘천지’이기 때문에 ‘천지’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이처럼 ‘온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하지 않고 ‘천지’를 창조했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하늘과 땅이 통째로 하나인 세상이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세상,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통합된 세상이다, 라고 세상의 근원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이라는 세계와 땅이라는 세계,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땅이 통째로 하나인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통합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묘하고 신비롭고 복잡하고 심오합니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것 같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 같고, 물질 덩어리인 것 같아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하늘과 땅(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물은 단지 만물이 아닙니다. 호랑이가 단지 호랑이가 아니고, 꽃이 단지 꽃이 아니고, 태양이 단지 태양이 아니고, 바다가 단지 바다가 아니고, 돌이 단지 돌이 아닙니다. 호랑이에게도 하늘이 함께 있고, 꽃과 나무에게도 하늘이 함께 있고, 태양과 달에게도 하늘이 함께 있고, 강과 언덕에게도 하늘이 함께 있고, 돌과 모래에게도 하늘이 함께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만물은 단지 만물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 단지 물질 덩어리가 아니에요. 이 세상은 하늘과 땅이 통째로 하나인 오묘하고 신비롭고 복잡하고 심오한 세계입니다. 이 세상은 단지 물질로 충만한 세계가 아니라 영으로 충만한 세계입니다. 이 세상은 단지 땅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땅과 하늘이 조화를 이룬 세계입니다.

 

세상의 이러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뭘 보면 세상의 이러함을 즉각 알 수 있을까요? 인간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과 똑같은 특성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천지가 공존하는 세계로 만드신 것처럼 인간도 천지가 공존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하늘이 지나치지도 않고 땅이 지나치지도 않게, 하늘과 땅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도 영혼이 자니치지도 않고 육체가 지나치지도 않게, 영혼과 육체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의 축소판으로 만드셨습니다. 세상의 특성을 고스란히 인간 속에 담아 창조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키가 2미터가 안 되고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안 되는 미미한 존재입니다.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참으로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연주자들이 바이올린을 켜고, 기타를 치고, 피아노를 치고, 5-60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걸 볼 때 어떤 감흥을 느끼십니까? 김연아가 빙판 위에서 스케이팅을 하거나 배우 김혜자 씨가 영혼의 표정까지 연기하는 걸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희열을 느끼지 않습니까? “아~예술!!”하며 감탄하지 않습니까? 원숭이나 개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원숭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지는 못합니다. 개가 발레를 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게 합니다.

솔직히 인간이나 원숭이나 개나 살덩어리로 치면 똑같은 살덩어리입니다. 유전자를 분석해도 인간의 유전자나 침팬지의 유전자나 98% 이상 동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과 침팬지의 몸은 기능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힘은 침팬지가 세지만 섬세하고 다양한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토록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의 몸이 침팬지나 개의 몸보다 훨씬 많이 하늘과 소통하고,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은 만물 중에서도 하늘과 가장 많이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룬 존재입니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가장 조화롭게 결합된 존재입니다. 달리 말하겠습니다. 인간은 놀랍게도 세상의 특성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이고, 세상의 어떠함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을 가리켜 ‘작은 우주’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인간은 진실로 작은 우주입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은 단지 작은 우주가 아닙니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우주보다 훨씬 큰 존재입니다. 우주보다 더 오묘하고, 우주보다 더 광대하고, 우주보다 더 위대하고 심오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우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하늘의 핵심 본질까지도 풍부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창1:26-27),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2:7)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인간됨을 규정하는 핵심 개념이기 때문에 마음 깊이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단지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단지 지성(知), 감정(情), 의지(意)을 가진 고등동물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자질이나 성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지성(知), 감정(情), 의지(意)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양심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외모를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소박하게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존재,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있는 존재, 하나님이 하시는 역할을 대행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형상의 본질은 존재의 유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유비에 있다.”(교회 교의학 Ⅲ권)

 

결국 성경이 인간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인간은 단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살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는 것,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역할을 대행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만물 중에서도 하늘을 가장 많이 가진 존재입니다. 하늘과 가장 많이 소통하고, 하늘과 가장 깊이 소통하고, 하늘과 가장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바꿔 말하겠습니다. 인간은 단지 인간이 아닙니다. 꽃은 단지 꽃일 수 있고, 호랑이는 단지 호랑이일 수 있지만 인간은 단지 인간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을 때, 하나님과 대화적 관계에 있을 때만 비로소 인간일 수 있습니다.

여러 신학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에밀 브루너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 안에서 메아리치게 하는 바로 그만큼 인간이다. 마치 여우가 여우이듯이, 우리도 그렇게 단순히 인간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메아리칠 바로 그때에 우리는 인간이다.”고 말했고, 고가르텐은 “인간은 참으로 인간이 될 수 있기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한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이 있다.”고 말했고, 초월적 인간학을 주창한 칼 라너는 “인간에 대한 정의는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초월성은 절대적 존재를 향한 절대적 개방성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희망의 철학자 블로흐도 “인간은 밀폐되어 있지 않고 앞을 향해 열려 있다.”고 말했습니다(H.G. 퓔만. 교의학. 7장 참조). 초대교회 신학을 집대성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평안하지 않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땅의 존재만도 아니고 하늘의 존재만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을 충만하게 담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땅의 존재인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분열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인간성이 무너지고 파괴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마비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겉모습은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내면의 근본 질서는 완전히 깨어져 조화로움을 잃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또한 하늘과 땅의 조화로움이 완전히 깨어지지 않겠습니까?

성경도 이런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에게 이런 이야기를 다 했어요. 아담아, 너는 내 말을 들어야만 산다, 네가 만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은 나를 떠나는 것이고, 나를 떠나는 것은 네 안에 있는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것이고, 하늘과 땅이 갈라지면 만물과 만인이 고통으로 신음하게 되고, 온 세상이 죽음의 종노릇하게 된다고 다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순간마다 경험하고 있듯이 지금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사랑과 행복은 말과 희망으로만 존재할 뿐이고 실제로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경쟁이고 전쟁이고 죽음입니다. 정치판의 여당과 야당만 싸우는 게 아니에요. 친구 간에도 싸우고, 가족 간에도 싸웁니다. 만인이 만인과 싸웁니다. 왜 이렇게 됐나요? 하늘과 땅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영혼과 육체가 갈라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구원이라니요? 영혼구원이라니요? 영혼과 육체가 갈라지고 분열해서 이런 재앙이 빚어졌는데 영혼구원이라니요?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곧 죽음이고, 영혼과 육체의 괴리가 곧 죄이고, 영혼과 육체의 분열이 곧 인간성 파괴이고, 더욱이 영혼만 존재하는 것은 인간일 수조차 없는데 영혼구원이라니요? 말이 안 됩니다.

영혼구원은 인간론적으로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영혼만 존재하는 인간은 없거든요. 영혼만 존재하는 인간은 애당초 존재할 수 없어요. 하늘만 존재하는 세상이 있을 수 없듯이 영혼만 존재하는 인간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육체만 존재하는 인간도 인간일 수 없지만 영혼만 존재하는 인간 또한 인간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애오라지 영혼과 육체가 하나일 때만 인간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 하늘과 소통할 때만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자고 하고서 만든 것이 영혼이었습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자고 하고서 만든 것이 바로 육체가 있는 아담이었잖습니까. 심지어 성경은 타락한 이후의 인간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약3:9)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몸을 가진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지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구원까지도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시켰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고(고후4:4, 골1:15), 그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마지막 날에 임할 세상에 대해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습니다(계21:1). 마지막 날에도 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땅 없는 하늘의 세계가 도래하는 게 아니고 땅이 있는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도 새로워지고 땅도 새로워진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때 재림하시는 분이 어떤 분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한 몸으로 승천하신 것처럼 부활한 몸으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혼구원이라니요? 영혼구원이라니요? 그런 구원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영혼구원론은 한 마디로 거짓이에요. 예수를 믿는 자가 죽으면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와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영혼구원론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짓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원론과 영혼구원론을 부정하는 최고의 논증이자 표증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영혼구원은 없다]고 온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구원은 없습니다. 인간과 세상의 구원이 있을 뿐 영혼 구원은 없습니다.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의 구원과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구원이 있을 뿐 영혼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