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기독교적 종말론]에 관한 책을 “끝 안에 시작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문장은 기독교 종말론의 정곡을 찌르는 핵심 문장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독교 종말론을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종말론은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말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엄청난 말씀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보다 더 놀랍고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쉬 믿어지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계21:5) 예,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이 말씀은 신실하고 참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만물 속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로 성육신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만물 속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아담이 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은 이야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 노아 때의 홍수 이야기, 아브라함을 부른 이야기,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이야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끌려간 이야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비롯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맨 처음 이야기와 맨 마지막 이야기라는 틀 안에서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읽어야 성경이 제대로 읽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대부분이 그 틀 안에서 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지는 이야기로 끝나는 책이라는 틀로 읽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말씀(계21:1)이 나오니까 이것이 성경의 마지막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그 틀로 성경을 읽습니다. 사실은 이 말 바로 앞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고(계21:1), 뒤이어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계21:5), 이기는 자는 이것들(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으로 받을 것(계21:7)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이런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이것이 성경의 마지막 이야기라고 단정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틀로 성경을 열심히 읽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읽을수록 왜곡이 심해지고 편견이 깊어집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런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사실 성경은 전체를 통해 부분을 읽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창조 이야기로 시작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이야기로 끝나는 책이라는 틀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대부분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창조 이야기로 시작해서 온 세상이 불타 없어지는 이야기로 끝나는 책이라고 단정해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부분에 갇히고, 문자에 갇히고, 문자에 현혹되고, 그래서 엉뚱하게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창조 이야기로 시작해서 온 세상이 불타 없어지는 이야기로 끝나는 책이라고 단정하고 읽으니까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더 깊이 생각하며 읽으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은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은 변화될 뿐이지 폐기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변화될 뿐 폐기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과 삶도 변화될 뿐이지 폐기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때가 되면 촛불이 꺼지듯이 때가 되면 우리의 생명과 삶도 꺼집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생명과 삶은 폐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하나님이 사랑이신 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민 손길을 놓지 않으시는 한 우리의 생명과 삶은 결코 폐기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도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4) 무슨 말입니까? 성도들이 죽었다고 해서 영영 사라진 게 아니다, 영영 폐기된 게 아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만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처럼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도 일으켜 다시 만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과 생명의 근원 진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이야기는 사실 이거예요.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삶까지도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 안에 거하라.]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근원 진실입니다. 그리고 이 근원 진실 - 우리의 생명과 삶은 죽음에 의해서조차도 폐기되지 않는다 - 을 말하기 위해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성경에는 이 근원 진실을 부정하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죽은 자들이 지금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말씀, 육체로의 부활을 부정하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함께 달린 죄수 중 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죄수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그중에 한 사람은 비웃듯이 예수님께 저주를 내뱉었습니다. ‘당신 메시아라고 그랬지. 그렇다면 당신부터 구해봐. 우리까지 구해주면 더 좋고!’ 이 사람은 정말 죽는 순간까지 악하고 어두웠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께 저주를 내뱉은 자를 꾸짖으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옳았다고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이 사람은 비록 죄수로서 비참한 십자가형을 받고 있지만 빌라도 총독이나 대제사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주소서!” 예수님은 이 간구를 듣자말자 곧바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8)고 응답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의거해서 사람이 죽으면 잠자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즉시 낙원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죄수가 그 날 낙원에 갔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도 숨을 거둔 즉시 낙원에 갔을 것이고, 옆에 있는 죄수도 바로 그 날 낙원에 갔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또한 죽으면 곧바로 낙원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낙원에 대한 이야기가 두 번 더 나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처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건을 말하면서 자기가 셋째 하늘(지극히 높은 하늘)에 이끌려갔었다고 말하고,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낙원에 이끌려간 것으로 바꾸어 표현했습니다(고후12:2-4). 또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2:7)는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낙원은 하나님의 낙원이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낙원은 천국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더더욱 확신을 갖습니다. ‘아~~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천국에 가는 게 확실하구나!’ 라고 확실하게 도장 찍고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것 외에도 비슷한 뉘앙스로 읽히는 대목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아주 솔직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지금 육신으로 사는 것과 죽는 것 중에 무엇이 유익한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후 대쪽 같은 진실을 말합니다.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다”(빌1:23). 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죽으면 곧바로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처럼 성경 곳곳에는 죽은 자들이 잠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있는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잠자는 상태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곧바로 낙원(천국)에 들어간다고 믿습니다. 육체 없는 영혼이 낙원에 들어간다고 믿어요.
완전한 오독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성경의 세계관으로 읽은 게 아니라 플라톤의 세계관으로 읽는 것입니다. 쇼킹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천국이 지금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늘저편 어딘가에 천국이 있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죽은 자들과 함께 그곳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나는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가서 너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요14:2,3)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고, 바울도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딤후4:18)이라고 했으니까, 하늘 저편 어딘가에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의 천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늘 저편에 있는 어떤 장소로서의 천국, 이 세상과 구별된 영적인 세계로서의 천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한 하늘(heaven-보이지 않는 세계, 영적인 세계)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늘(heaven)은 천국(kingdom of God)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하늘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하늘은 천국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영적인 세계나 구름 속에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하늘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곧 천국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바로 그 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만이 천국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전까지는 엄격한 의미에서 천국(하나님나라)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화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무슨 말입니까? 천국이 지금 여기에 오기는 왔는데 완전히 당도한 게 아니라 가까이 왔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천국이 지금 여기에 임했지만 아직은 희미하게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경험하는 부분적인 천국이 있을 뿐이지 구체적 현실로서의 천국은 아직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체적 현실로서의 천국은 아직 없습니다. 부분적인 천국, 우리 마음에 임하는 천국은 지금 여기에 있으나 구체적 현실로서의 천국은 아직 없습니다. 천국은 있으면서 동시에 없어요. 공연한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엄정한 진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끈질기게 하늘 저편 어딘가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도 그런 오해를 부추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것이고 주와 함께 항상 있을 것이다.’(살전4:16,17).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현혹되어 천국이 하늘 저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자들과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 자들이 이 땅에서가 아니라 구름 속으로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함께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으니까 문자 그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으로 올라갈 것이고, 공중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자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자꾸 문자를 중시한다면서 문자에 현혹되는데 문자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져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주의 재림을 고대 그리스나 로마 황제의 행차에 비유해 말한 것입니다. 로마시대에 황제가 데살로니가를 방문한다고 하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서 황제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황제가 데살로니가에 당도하기 전에 데살로니가 밖으로 나가서 황제를 영접하고 황제와 함께 데살로니가로 돌아옵니다. 우리도 귀한 손님이 오면 안방에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지 않잖아요. 대문 밖으로 나가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면서 ‘성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으로서 오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을 어지럽혔던 모든 어둠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한 왕으로서 오시는 것이다,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성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톰 라이트.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360쪽).
또 하나 “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 속에는 아주 실제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몸이 어떤 몸으로 변하냐, 주님의 몸이 자유롭게 하늘에 올라가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기도 하는 몸인 것처럼 성도들의 몸도 자유롭게 구름 속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하는 몸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아주 실제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357쪽).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천국을 구름 속에 있는 어떤 장소라고 상상합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불타 없어진 세계가 천국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천국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한 세계로서의 천국을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세계로서의 천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완성되는 형태로서의 천국을 말할 뿐입니다. 이 천국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써 이미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듯이 천국의 도래도 기다려야 하고, 죽은 자들의 부활도 기다려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재림과 천국의 도래와 죽은 자들의 부활은 동시적 사건이자 하나의 사건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이 천국이 도래하는 날이고, 천국이 도래하는 그 날이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는 천국은 있으나 천국은 없고, 부활은 있으나 부활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죽은 자들을 잠자는 자들에 비유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부활인데 아직은 부활의 날이 오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부활을 기다려야 하니까 죽음을 잠자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으니까 잠자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예, 죽은 자들은 지금 천국에 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주님 재림하시는 날 비로소 실현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은 지금 천국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건 맞지만 천국에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주님 안에 있으나 천국에 있는 건 아니듯이 죽은 자들도 주님 안에 있으나 천국에 있는 건 아닙니다. 아직은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천국의 도래를 기다리고, 부활의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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