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첫 번째로 쓴 목회 서신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오랫동안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재림신앙이 뜨거웠습니다(살전1:10).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지 2천 년이 지난 지금은 재림신앙이 뜨겁지 않은데, 3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그 당시에는 재림신앙이 뜨거웠습니다. 다들 가까운 장래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고 그 날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은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던 성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죽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 둘씩 죽어가는 성도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시는지, 죽은 성도들은 어디로 가는지, 죽은 성도들은 부활의 날까지 어떻게 지내는지 등등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저런 억측에 휩쓸리기도 하고, 엉뚱한 것을 진리인양 믿고 따르기도 합니다. 사실 최초의 신학자인 바울이 알아듣게 말했는데 교회의 상황은 거의 나아진 게 없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첫 번째 편지에서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4:13) 바울은 죽은 자의 문제를 말하기에 앞서 성도들이 이 문제의 진실을 알아야 하고, 알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믿음에는 앎이 뒤따라야 합니다. 믿음에 앎이 뒤따르지 않으면 믿음이 위태롭기 쉽고, 무지몽매에 빠지기 쉽고, 거짓 진리에 속기 쉽고,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기 쉽습니다. 교회 역사가 증명합니다. 믿음에 마땅히 알아야 할 앎이 뒤따르지 않을 때는 항상 거짓과 속임수와 사악함이 기생했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이 사실을 거듭거듭 발견했습니다. 앎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처럼 위험하고 파괴적이고 어리석고 고집스럽고 편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정말 진저리가 나도록 발견했습니다.
사실 목회란 다른 게 아닙니다. 성도들이 눈떠가는 일을 옆에서 돕는 것이 목회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목회의 전부일지도 몰라요. 성도들 또한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조건 믿음으로 내달려서는 안 되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거짓 진리에 속지 않을 수 있고, 필요 없는 슬픔과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한 걸음씩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고, 건강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쓴 것도 그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 건강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이 교회 저 교회에 열심히 편지한 것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상태를 한 마디로 자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v.13,15),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v.14),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v.16)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언제까지 잠자느냐, 주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잠자는 상태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v.15,16).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읽은 사람은 이 사실을 압니다. 구약성경부터 신약성경까지 줄곧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적잖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믿는 것은 다르게 믿습니다. 성도가 죽으면 곧바로 영혼이 천국에 올라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영혼이 천국에 올라가서 무한한 기쁨을 향유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일관되게 죽은 자들이 잠자고 있다고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대다수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죽음이 곧 천국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 이야기에도 귀를 쫑긋 기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안 됩니다. 그런 이야기는 성경이 말하는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 귀를 혹하게 하는 사탕발림일 뿐이지 성경이 말하는 진실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진실은 결코 천국행이 아닙니다. 죽음은 결코 천국행이 아니에요.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입니다. 죽음은 어디까지나 죽음이지 천국행 특급열차에 올라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일차적 진실입니다.
물론 성경은 죽음을 꼭 죽음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계속 말했다시피 성경은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냥 죽음을 죽음이라고 말하면 헷갈리지 않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죽음을 천국행 특급열차에 올라타는 것이라고 말하면 싫어하는 사람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지 않고 꼭 잠자는 것으로 비유해 말합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성경은 왜, 바울은 왜,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할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과 죽음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보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나라가 예수의 성육신과 함께 이미 시작됐지만 아직은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다는 구원사적 긴장 때문입니다.
성경은 생명과 죽음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지 않습니다. 생물학적 차원의 생명과 죽음을 무시한다는 게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시각에서 본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창조한 이야기를 보십시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만드실 때 단지 흙으로 만든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루아흐, 숨)를 불어넣었고, 그렇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창2:7). 여러분, 이 말은 하나님이 코에 생기를 불어넣기 전까지는 사람이 숨을 안 쉬다가 생기를 불어넣자 비소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마도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문자적으로 생각할 텐데 그런 말이 전혀 아닙니다. 사실 아담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기 전에도 숨을 쉬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숨을 쉬듯이 아담도 숨을 쉬었어요. 그런데도 성경이 굳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말하고,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아담이 언제부터 숨을 쉬었느냐를 알려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생명은 하나님에게 공급받는 것이라는 것, 생명은 하나님과의 소통에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근원 진실을 알려주려고 그런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먹으면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창2:17). 이 말은 사람의 심장이 멎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반역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막히고 뒤틀리는 것이 곧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는데도 바로 죽지 않고 930세를 산 것도 심장이 멎은 게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죽음이라는 근원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보기에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아담과 먹은 이후의 아담은 같은 아담일까요 다른 아담일까요? 당연히 같은 아담입니다. 적어도 사람이 보기에는 그 아담이 그 아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같은 아담이 아닙니다. 선악과 먹기 이전의 아담은 생명이 있는 아담이고, 선악과 먹은 이후의 아담은 생명이 없는 아담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생명과 죽음을 심장이 뛰느냐 뛰지 않느냐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문제로 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해야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돼야만 우리에게 생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내신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회복시킨 이 관계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단언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고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
정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이 관계는 죽음에 의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아요.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은 자는 죽었어도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변함이 없는 거니까 죽었어도 생명인 겁니다. 물론 죽은 것은 죽은 거니까 몸으로 살아있을 때하고는 다른 생명이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생명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를 죽은 자라고 말하지 않고 잠자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 성경이 죽은 자를 잠자는 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와 함께 이미 시작됐지만 아직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하나님나라가 예수와 함께 이미 이 땅에 임했지만 아직은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와 ‘아직은 아님’이라는 구원 역사의 중간 지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구원 역사의 두 지점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초림에 의해 시작돼서 예수님의 재림에 의해 완성되는데 우리는 지금 그 중간 지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절대 부활의 몸을 입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답답하더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서 죽은 성도들은 지금 아주 미묘한 상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습니다. 몸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몸은 죽어 땅에 묻혔고, 다 썩고 분해되어 흔적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에 죽었어도 죽은 게 아닙니다. 죽었어도 여전히 생명입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제가 지금 영혼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영혼이 천국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몸을 가진 생명은 죽었으나 몸을 넘어서는 생명은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에게는 죽음도 있고 생명도 있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형식과 생명의 형식이 미묘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 이것이 죽은 자의 현재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죽은 자를 죽은 자라고 말하지 않고 잠자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는 은유로 표현한데는 깊은 신학적 사유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보는 신학적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잠이라는 은유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11:25-6)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바울이 죽은 자를 가리켜 ‘잠잔다’고 표현한 것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살 것이라고 믿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영원불멸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또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고 잠자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죽음보다 더 강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관점이 생명과 죽음을 바라보는 성경적 관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지금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습니다.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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