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부활12 - 빈 무덤 (마가복음16:1-11)

새벽지기1 2019. 6. 3. 07:15


기독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의 정서나 구미에 맞지 않습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인간의 정서나 구미에 맞도록 많이 변질이 됐습니다만 본래 기독교 복음은 인간의 정서나 구미에 맞지 않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성경은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데 예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참으로 기이합니다. 성경은 예수가 처녀인 여자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합니다. 각종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고,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려내고,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 떡 두 개로 오천 명을 먹였다고 말합니다.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3일 만에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부활한 후에는 50일쯤 있다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말합니다.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지각이나 이성이나 경험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특히 부활에 대해서는 성경도 그 기이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사람은 갈릴리 서쪽의 막달라 출신으로 ‘일곱 악령(귀신)’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에게 고침 받고 예수를 따르게 됐습니다(눅8:2-3).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를 받고 깊은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만큼 막달라 마리아는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아낌없이 예수님 발에 부을 만큼 헌신적으로 사랑했습니다.(눅7:36-50).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쳤지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지켜봤습니다(마27:56).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은 후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사놓았다가 안식 후 첫날 동이 트자말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다른 두 여자와 함께 무덤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돌을 어떻게 굴려야 하나, 고민하면서 안식 후 첫 날, 날이 밝자말자 일찍이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무덤에 가보니 놀랍게도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누가 굴렸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무덤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잃은 상처와 슬픔을 억누르며 시신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조심스레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마땅히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시신은 없고 대신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했는데(마26:2) 마가는 흰 옷 입은 청년이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그 청년을 보고 흠칫 놀랐습니다. 그걸 보고 청년이 말했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러나 그는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v.6)

 

청년은 분명히 놀라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이 말은 정말 귀를 의심해야 마땅한 말이지 않습니까.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적인 말이지 않습니까. 마가도 그 사실을 말합니다. 여자들이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무덤에서 도망쳐 나올 정도로 무서워했다고 말합니다. 정녕 그랬을 것입니다. 해머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 두뇌가 멈춘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머리가 하얗게 되어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는 아노미 상태가 됐을 것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머리가 하얗게 되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아노미 상태가 됐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지탱시켜줬던 세계관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분명히 이틀 전에 죽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무덤에 장사까지 지냈습니다. 거기다가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고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없어진 겁니다. 흰 옷 입은 청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얼마나 황망하고 무섭고 어리둥절했겠습니까. 아마 기존의 모든 것이 흔들리는 세계관의 대지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아~ 우리가 기대했던 일이 정말 일어났네.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부활의 순간을 기다려왔는데 정말 그 기대가 헛되지 않았네.’라고 환호성을 지른 자가 없었습니다. ‘어서 빨리 일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가자’고 외친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거나 예상한 사람도 없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린 사람도 없었고, 부활 소식을 듣고 믿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들 ‘잉~ 무슨 소리야! 예수님이 부활했다니, 그럴 리가 있나.’라는 반응 일색이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이나 이성이나 경험과는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과학으로는 절대 검증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다들 놀라고 무서워하고 도망치고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솔직히 부활을 기대하고 상상하는 게 이상하고, 부활 소식을 듣고 단박에 믿는 게 이상하지, 놀라고 무서워하고 믿지 않는 게 이상하지는 않잖아요.

 

정말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 가운데 마지막 때에 부활할 것이라고 믿은 자들은 더러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지막 때에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믿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믿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겁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다들 놀라고 무서워 한 것이고, 믿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것이 사실이듯이, 갈릴리를 중심으로 이적과 권능을 행하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한 것이 사실이듯이, 또 빌라도 총독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사실이듯이, 예수님의 부활 또한 사실입니다. 물론 과학적 사실은 아닙니다. 과학으로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에요. 그러나 역사적 사실인 것은 맞습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 변방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까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증거도 있습니다. 빈 무덤이 첫 번째 증거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제자들과 오백여 형제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것이 두 번째 증거이고, 그들의 증언을 모아놓은 성경이 세 번째 증거입니다.

 

이 증거 중에 가장 강력한 증거는 무덤입니다. 무덤은 죽음을 확정하는 최종적 표식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곳이 바로 무덤입니다. 무덤을 보면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곳도 무덤입니다. 무덤 안에 예수의 시신이 있으면 예수의 죽음이 확정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가장 경계한 것이 바로 무덤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아주 주도면밀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었습니다.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세밀하게 분석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가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까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 총독에게 부탁해 예수의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마27:63-64).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가기라도 하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 빤하기 때문에 경비병들을 세워 철통같이 지키게 했습니다. 무덤 사수 작전을 편 것입니다.

 

하지만 무덤 사수 작전은 허사였습니다. 예수의 무덤은 텅 비었습니다. 이틀 전에는 분명히 무덤 안에 시신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처와 피로 얼룩진 시신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철통같이 지켰습니다. 그런데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보니 무덤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자, 어떻게 된 것일까요? 무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크게 네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대제사장들이 계략을 꾸민 대로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도둑질해갔을 수 있습니다. 둘째, 어떤 연유가 있는지는 모르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시신을 빼돌렸을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신앙고백일 수 있습니다. 넷째, 진짜로 부활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사실일까요? 과연 어떤 것이 사실일 수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보겠습니다.

첫째,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도둑질해갔을 가능성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가장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을 검토해보면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우선 로마의 경비병들이 예수의 무덤을 철통같이 지켰습니다.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아놓은 데다가 경비병들이 철통같이 지켰기 때문에 제자들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시신을 도둑질해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더구나 제자들이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게 못 박혀 죽을 때 다 도망쳤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믿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런 자들이 과연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시신을 도둑질해갔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 경비병들이 시신을 빼돌렸을 가능성입니다.

이 가능성이 현실화되려면 예수의 시신을 빼돌려야만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경비병을 매수해서라도 예수의 시신을 빼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빌라도나 헤롯 왕가나 대제사장들 가운데 하나여야 하는데, 저들 정도는 돼야 경비병들을 매수해 시신을 빼돌릴 수 있는데, 저들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질까 염려했던 자들이지 예수의 시신을 빼돌려야 할 이유가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 번째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셋째,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신앙고백일 가능성입니다.

이 가능성이 현실화되려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간절히 사모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의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간절히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보며 뿔뿔이 흩어졌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증언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 번째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입니다. 실제로 부활했을 가능성입니다. 이것은 현실화될 것이라고 예상하기가 거의 어려운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에 죽은 아들을 살려냈습니다.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데,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설명이 안 됩니다. 어떤 이론을 동원해도 속 시원한 설명이 안 됩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을 가리켜 ‘이 일이 몸 안에서 일어났는지 몸 밖에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했고, 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했습니다(고후12:2-4).

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대체로 설명이 안 됩니다. 세계를 창조한 것도 설명이 안 되고, 말씀이 육신이 된 것도 설명이 안 되고, 부활한 것도 설명이 안 됩니다. 인과론으로도 설명이 안 되고, 어떤 추론을 들이대도 설명이 안 되고, 역설의 논리로도 설명이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일어났습니다. 증거도 충분합니다. 빈 무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제자들과 오백여 형제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것, 그들의 증언을 모아놓은 성경,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하면서까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 것 등이 증거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복음을 말하면서 ‘이것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요일1:1). 옳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종교적 이론이나 환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원이나 희망을 투사한 것이 아닙니다. 거짓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의 복음은 사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보고, 베드로가 보고, 의심 많은 도마가 보고, 바울이 본 역사적 사실입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의 복음은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넘어선 사실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과학을 넘어선 사실이고, 논리를 넘어선 사실이고, 인간의 사실을 넘어선 하나님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상식을 가지고서는 믿기가 어렵습니다. 제정신을 가지고서는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믿습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듣고, 바울의 증언을 듣고, 가족과 친구의 증언을 듣고 믿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믿고 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 온 세상이 비웃는 일을 믿고 있습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예수의 복음은 우리의 정서나 구미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 이성에도 맞지 않고, 우리 욕망에도 맞지 않고, 우리 정서에도 맞지 않고, 우리 의지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니까, 비록 우리 정서나 구미에 맞지 않고, 그래서 제정신을 가지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사실이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사실이니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교리를 믿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니까 그분을 의지하는 게 좋다는 막연한 추론을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희망이나 기대를 믿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빈 무덤이 증언하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사실을 믿습니다. 물론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닙니다. 믿을 수 없는데 믿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데 사실이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사실이니까, 우리의 이성을 거슬러 가면서, 우리의 욕망과 정서와 의지를 거슬러 가면서 힘겹게 믿는 것입니다. 또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싸워가면서 믿는 것입니다(고후4:6). 그래서 믿음은 기적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기 자신과의 내적 싸움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을 수 있는 일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사람입니다. 온 세상이 비웃는 일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워가면서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그리스도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