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부활14- 부활 신앙의 정체 (사도행전2:14-24)

새벽지기1 2019. 6. 17. 11:42


1. 사람은 단지 살지 않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동경하며 삽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살고,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며 삽니다. 내적으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삽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끝없이 반복됩니다. 해 뜨는 게 반복되고, 달이 차고 기우는 게 반복되고, 그와 함께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고, 사계절이 반복되고, 물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내려오는 게 반복되고, 주일마다 하나님 예배하는 게 반복되고, 꽃이 피고 지는 게 반복되고,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게 반복되고, 사람 또한 먹고 싸고 자기를 반복하고,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낳고 죽기를 반복합니다.

니체는 세상의 이런 현실을 꿰뚫어보고 아예 ‘영원회귀’(永遠回歸)를 말했습니다. 영원한 시간이 원형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서 우주와 인생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전도자도 말했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전1:9)

 

2.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끝없이 반복합니다.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존재양식이고 생존양식입니다. 그런데 예외적인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반복된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반복되는데 예수님의 부활만큼은 반복된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복되지 않음’속에 담겨 있는 뜻은 무엇일까요? 부활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매우 특별한 일이라는 뜻일까요? 우리는 부활할 자격이 없고 예수님만 부활의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반복되지 않았다는 것 속에는, 그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보통 일과는 종류가 다른 일, 차원이 다른 일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부활은 이 세상 일이 작동하는 구조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이 세상 일이 작동하는 구조 안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부활도 다른 일처럼 끝없이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해마다 꽃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반복하듯이 사람들도 예수님처럼 죽고 부활하고 죽고 부활하고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떤 반복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 안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꽃이 피고 지는 것과는 뭔가가 다른 구조 속에서 일어났다는 걸 함의합니다. 꽃이 피고 지는데 작용하는 요인과는 뭔가가 다른 요인이 작용했다는 걸 함의합니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구조 속에서 일어난 것일까요? 어떤 요인이 작용해서 일어난 것일까요? 한 마디로 이 세상에 속한 요인은 하나도 작용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따라 일어난 일입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땅의 수분이라든지 온도가 작용해서 일어납니다. 밀물과 썰물도 달과 지구 사이의 인력으로 인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일은 끝없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세상의 요소가 하나도 작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오직 말씀과 능력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오직 말씀과 능력으로 하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이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자들이 있는 눈앞의 사실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대화한 자들이 있고 함께 음식을 먹은 자들이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한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요인이 작용해서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작용해서 일어났습니다.

 

4. 그래서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요소가 작용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능력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해되지도 않고 포착되지도 않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앤터니 플루가 잘 말했어요. “저는 (부활이라는) 이 상황이 대단히 혼란스럽습니다. 설령 부활이 일어났다고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너무나도 특이한 사건이라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부활논쟁. 51쪽) “부활은 제가 이 세상에서 경험해본 것들과 너무나 달라서 그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같은 책. 66쪽)

정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이해가 안 되고, 포착이 안 되고, 경험이 안 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이치는 이해가 되고, 꽃이 피고 지는 이치도 이해가 되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이해가 되고, 밀물과 썰물의 이치도 이해가 되는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한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5.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부정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고 설명이 안 되니까 부활은 없다, 부활은 환상이거나 거짓이거나 종교적 신념에 불과하다, 라고 깡그리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본 사실이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본 사실이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보고 경험한 사실입니다.

물론 저들이 상상하거나 기대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고 상상하거나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기대하지 않았고, 베드로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상상하지 않은 일,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6.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자들은 다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스승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스승님이 죽음을 앞에 두고 근심하고 있을 때에도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툴 정도로 형편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스승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도 스승님의 유지를 어떻게 받들까를 고민하기보다는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함께 모일 때 방문을 다 걸어 잠글 정도로 유대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 어떻게 됐습니까? 유대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던 자들이 갑자기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을 제대로 깨닫고 아주 담대하게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행2:22-24,36). 예루살렘의 공회원들이 저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전혀 굴하지 않고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행4:13-20).

 

6.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소인배에 불과했던 제자들이 왜 그렇게 달라진 것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뿐인데 말이죠.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 단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은 단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구조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보고 경험했던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또 새롭게 본 세계가 지금까지 그들이 보고 경험한 세계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온전한 세계라는 걸 직관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북한에 사는 사람을 예로 들어봅시다. 지금은 북한도 어느 정도 개방이 됐습니다만, 완전히 폐쇄된 시절에 북한 사람이 유럽이나 미국에 갔다고 해봅시다. 뉴욕 한 복판에 가고 파리 중심가에 갔다고 해봅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아마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해머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나라가 북한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사람이 자기들처럼 먹고, 자기들처럼 생각하고, 자기들처럼 생활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북한과 다른 것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엄청 분노할 것입니다. 북한을 바라보는 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계관의 대변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더 이상 북한에서 살았던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7. 예수님의 부활을 본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저들은 지금까지 모든 것이 반복되는 세계를 살아왔습니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인 세상이 정상적인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이 보고 경험하고 믿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습니다. 무덤을 박차고 일어난 예수님을 봤습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봤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북한 사람이 뉴욕이나 파리에 갔을 때 받았을 충격과 같은 충격을 받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세계관 전체가 무너지고 깨어지는 세계관의 대변혁이 일어났지 않겠습니까? ‘아~~ 이 세상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그런 세상이 아니로구나.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이라고 생각한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로구나. 그것은 반쪽 세상에 불과하고 우리가 지금 보는 부활의 세계가 진짜 세상이로구나.’라고 깨달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자들은 하나 같이 세계관(세상을 보는 눈)의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막달라 마리아의 눈(세계관)이 달라졌고,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눈이 달라졌고, 요한과 도마의 눈이 달라졌고, 사울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본 것은 단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봤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보고 경험했던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봤고, 한 번도 상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은 세계를 봤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더 이상 침범할 수 없는 세계,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통합된 세계, 이런 세계는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세계요 상상도 하지 못한 세계요 경험도 해보지 못한 세계인데 그런 세계를 봤습니다.

그리고 보자 말자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본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세계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종말의 세계라는 것이 확실해보였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희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환상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눈으로 본 것이고, 귀로 들은 것이고, 손으로 만진 것이었습니다(요일1:1).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본 것이었습니다.

 

8.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는 세상만이 참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세계가 실제 세상이고, 그 밖의 세계는 다 환상이고 거짓이고 종교적 신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말하지만 하늘나라도 이 세상과는 별 관계가 없고 죽음 이후에나 가는 세상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세상을 그렇게 생각했고, 로마 황제와 유대 왕 헤롯과 총독 빌라도도 그렇게 생각했고,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은 참세상이 아닙니다. 땅만 있는 세상, 하늘과 땅이 분리된 세상은 참세상이 아니에요. 오직 하늘과 땅이 하나인 세상,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통합된 세상만이 참세상입니다. 비록 지각되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고, 경험하기도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그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 세상이고,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실 세상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그 세계가 진짜 세상입니다.

 

9. 자고로 진짜를 보면 가짜가 보이는 법입니다. 가짜만 봐서는 가짜가 보이지 않아요. 진짜를 봐야 가짜가 보입니다. 제자들은 진짜를 봤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참모습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예수라는 창을 통해 잠깐, 부분적으로 본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진짜를 봤습니다. 그러자 가짜가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보고 경험한 세계는 반쪽 세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보였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세계관)이 달라졌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씀이 제대로 이해됐습니다. 세계관의 대변혁이 일어난 겁니다.

 

10. 이렇게 세계관에 대변혁이 일어나니까 더 이상 이전의 가치관대로 살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 살던 방식대로 살 수 없었습니다. 저들은 함께 모여 음식을 먹고 기도했습니다. 모든 소유물을 서로 공유하면서 필요를 따라 나눠줬습니다(행2:44-47).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담대하게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냈다고 증언했습니다.

자기들이 본 세계가 진짜니까, 이 세계를 증거하고 이 세계를 향해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이니까, 순교를 당하는 한이 있어도 그 세계를 증언하며 그 세계를 향해 살았습니다.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그런 게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원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삶의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계관의 대변혁이 일어나고, 삶의 대변혁이 일어나는 것까지가 부활 신앙입니다. 이런 부활 신앙으로 세상을 달리 보면서 하루하루의 인생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