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감동해도 부족할 정도로 기막히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실을 꿰뚫어본 고타마 싯다르타는 “인생은 고(苦)”라고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스코트 팩도 “삶은 고행이다. 이 말은 위대한 진리이며, 가장 위대한 진리들 가운데 하나”라고 했습니다(끝나지 않은 길. 17쪽). 사실입니다. 삶은 고행이요 아픔입니다.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든, 성품이 훌륭한 사람이든 차이가 없어요. 모든 삶에는 상처가 있고 얼룩이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이나 역경이나 아픔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우리를 해치 못하게 하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지켜주신다고(시121:3-6) 했으니 어떤 고난이나 아픔도 없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도와주실 것이라고, 엄마가 자식을 치마폭에 감싸 키우고 사랑하는 딸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키우듯이 그렇게 우리를 키우실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그러시던가요?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렇게 끔찍하게 우리를 아끼며 지켜주시던가요? 안타깝게도 그러지 않으십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에 의해 유태인 600만 명이 죽어나가는데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세월호 침몰로 꽃 같은 아이들이 수장당할 때에도 하나님은 지켜주지 않으셨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기막힌 곤경에 처할 때에도, 이런저런 일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마음에 깊은 어둠이 드리울 때에도 하나님은 나서서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내 지혜와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어서 피를 토하며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데도 꿈쩍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3.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실 뿐만 아니라 능력이 크신 분이신데, 그런 분께서 왜 슈퍼맨처럼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 것일까요? 왜 인생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일까요? 좀 더 확실하게 믿으면 지켜주실 텐데 믿음이 부족해서 안 지켜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슈퍼맨처럼 필요한 때마다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슈퍼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전제 군주나 영화에 나오는 슈퍼맨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완벽하게 지켜주시는 방패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윗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오, 나의 피난처시오, 나의 산성이시오, 나의 구원자’시라고(삼하22:3). 옳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피할 바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방패, 우리가 생각하는 피난처는 아니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했는데,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그처럼 열심히 우리를 지켜주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라고 했는데,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방패막이 해주는 게 별로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했는데, 현실을 보면 기도 응답이 별로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했는데, 현실을 보면 사랑의 모습이 별로 안 보입니다. 세상의 어머니는 자식이 길가다가 넘어지면 ‘아이고 내 새끼야!’ 하고 얼른 달려와서 안아주는데, 하나님은 얼른 달려와 안아주지 않으세요. 세월호에 갇혀 304명이 죽어갈 때에도 하나님은 꿈쩍도 안 하셨습니다. 슈퍼맨 같으면 분명히 세월호를 들어 올리든지 폭파시키든지 해서 사람들을 구해냈을 겁니다. 아주 멋지게 통쾌하게 구해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4. 왜 그랬을까요? 왜 통쾌하게 구해내지 않으셨을까요? 그렇게만 하면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넙죽 엎드려 절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닐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사건만 놓고 봅시다. 하나님은 세월호에 갇힌 304명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구하지 않은 것일까요, 구하지 못한 것일까요? 아주 정직하게 말하면, 304명의 목숨을 ‘구하지 않은’ 게 아니라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구하지 않은’게 아니라 ‘구하지 못한’ 거예요. 만일 구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기막힌 초능력을 발휘해서 304명 전원을 구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슈퍼맨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일 수는 없어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슈퍼맨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 자기 맘대로 하는 전제군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슈퍼맨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전제군주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는 호위무사가 아니십니다. 자식을 치마폭에 감싸 키우는 어머니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슈퍼맨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 것이고, 인생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5. 둘째로, 하나님이 슈퍼맨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픔을 통해서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각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육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굳센 의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나 오늘부터 변할 거야!’라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변하지 않아요.
그리스도인은 매사를 너무 쉽게 믿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도 성령의 불세례를 받으면 하루아침에 180도 변화된다고 믿습니다.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 하루아침에 변화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믿고, 또 그랬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간증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성령의 불세례를 한 번 받았다고 해서 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한 순간에 일어나지만 인격과 삶은 한 순간에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백독했다고 변하지 않아요. 40일 금식 기도 했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픔을 겪어야만 변화됩니다. 뼈가 녹는 아픔을 겪어가면서 조금씩 변화되고,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깨어집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은 진공 속에서 변하지 않습니다. 홀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면벽수행 한다고 해서 변하지 않아요. 사람은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사건 속에서 변합니다. 돌과 돌이 부딪쳐야 마모되는 것처럼 사람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부딪쳐야 변합니다. 서로 갈등하고 오해하고 어긋나는 가운데 애간장이 끓는 아픔을 겪어야 조금씩, 용의 눈물만큼씩 변합니다. 정말입니다. 사람은 아픔의 과정 속에서 변하고, 아픔의 깊이만큼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슈퍼맨처럼 어려울 때에 나타나 도와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우리가 갈등 속에서 아파하고, 관계 속에서 깨어져야 변할 수 있으니까, 우리의 변화를 위해서 슈퍼맨 노릇 안 하시는 것이고, 방패막이 노릇 안 하시는 겁니다.
6. 여러분, 하나님의 최고 관심사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최고 관심사는 단연 인간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맨 처음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변화’를 뜻합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 전체가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변화의 중요성을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심지어 모든 피조물들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열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롬8:19-21).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온 세상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진공 속에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아픔 없이, 고통 없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픔의 과정 속에서 변하고, 아픔의 깊이만큼 변합니다. 원칙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변화되지만 현실적으로는 고난과 고통을 통해 변화됩니다. 아픔의 과정 속에서 변하고, 아픔의 깊이만큼 변합니다. 매우 잔인한 사실입니다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나의 아픔이 곧 내가 가야 할 길이 됩니다. 내가 아파하는 그곳이 바로 내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슈퍼맨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도와주시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해결해주시면 아픔을 겪을 기회 자체가 없어질 것이고, 아픔이 없으면 변화되지 않을 테니까,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7. 아픔이 길이 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신비이고 삶의 신비입니다. 물론 아픔이 무조건 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합니다.
첫째, 삶은 고행이요 아픔이라는 사실을 차갑게 인정해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스코트 팩은 “삶은 고행”이라고 말하면서 “삶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된다.”(끝나지 않은 길. 17쪽)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사람은 신비한 존재라서 삶이 어렵다는 것, 삶은 아픔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기만 해도 아픔을 이길 힘이 생깁니다.
둘째, 성령의 도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요 창조의 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생기를 북돋아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고, 인생의 아픔에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아픔을 견디고, 아픔을 딛고 일어설 힘을 줍니다. 아픔 속에 있는 길을 보게 합니다. 아픔 속에 있는 길을 보게 함으로써 결국 아픔이 길이 되게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 같은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아픔이 길이 되는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바울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5:4)
한 마디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나님은 인생의 고난과 환난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아픔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켜 가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오해하는 그리스도인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인생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신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거짓입니다. 100% 거짓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생의 어려움을 깔끔하게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망한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우리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세요. 오히려 시련과 역경을 만나게 하시고, 실패와 아픔을 겪게 하십니다. 실패와 아픔을 겪어야만 우리가 변하고 아픔의 깊이만큼 변하니까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또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 진짜 영광이고 진짜 복이니까 진짜 영광과 진짜 복을 누리게 하려고 슈퍼맨 노릇 안 하시고, 인생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으십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성인의 족적, 아름다운 삶의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 욥, 다윗, 베드로,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프란시스코, 잔느 귀용, 베토벤, 간디, 마르틴 루터 킹, 김대중 등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저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저들은 아픔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아픔이 많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 저들은 누구보다 많은 아픔을 겪고, 누구보다 깊은 아픔을 통과한 자들입니다. 바꿔 말하면 아픔을 통해 길을 걸어간 자들입니다. 아픔이 길이 된 사람들, 아픔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픔을 통해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픔이 단지 아픔으로 끝나지 않고 아픔이 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아픔이 길이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 성령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 사람은 진정 믿음의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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