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색지대에 살지 말라!
(요12:37-43)
◆본문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서론
본문 앞 단락 20-36절은 헬라인들의 방문과 그에 이어지는 교훈을 통해 예수께서 스스로 만민의 구주로 오셨음을 증거하신 사실과 자신을 죽이려하는 유대인들을 피해 숨으신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서는 먼저 예수의 행적 소개가 잠시 중단 된 채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요한의 평가가 부록처럼 삽입된 내용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패역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불신하며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53장:1을 인용하여 유대인의 불신앙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37-40절 말씀을 천천히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유대인의 불신앙)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말씀 성취-예지-foreknowledge)이라 이르되 주여(이사야가 본 예수) 우리(선지자들)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예수)의 팔(예수의 신적 권능)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유대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요한의 재해석-예지하신 일)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바로를 강퍅하게 하심)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예정-predestination)이라 하였음이더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영안을 어둡게 하시거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본문은 예정의 성격 보다 예지의 성격이 강함(하와의 선악과 사건과 바로의 강팍한 마음을 미리 아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조종하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들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조종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을 미리 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42-절 말씀도 보겠습니다.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생계, 인간관계-친구/부모/직장상사)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미움/꾸중/불이익)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당시 이렇게 모두가 예수님을 부정하고 배척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하지만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두려워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출회(쫓겨남)?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42절).
예수 믿으면 관원(공무원)으로서 혹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 받으면 되지 굳이 드러낸 놓고 믿을 필요가 있는가?-
다시 말해서 본문은 예수님 당시 ‘신앙의 회색지대’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다(43)'
한 마디로 ?비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회색지대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저울 한쪽에는 인간의 영광을 올려놓고
다른 쪽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올려놓고 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렇게 영적 회색지대에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론
그러면 우리가 신앙의 회색지대에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신앙고백’이 분명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위인들의 유명한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우리도 여호수아처럼(수24:15) 신앙의 결기를 다져야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다니엘의 친구들처럼(단3:17-18)은 바벨론왕 앞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 젊은 청년들의 신앙고백이 도전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은 조건이 아닙니다.
‘~해주시면, ~이렇게 하겠다’가 아니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겠다’가 진짜 신앙입니다.
다음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입니다.
28살의 한 청년이 사형대에 묶여 있었습니다. 영하 50도의 추위가 청년의 살을 도려내듯 추웠습니다. 이제 청년에게 주어진 인생시간은 단 5분. 청년은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며 28년의 삶에 대한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구나’
그때 멀리서 한 병사가 황제의 특사명령을 가지고 달려오면서 외쳤습니다.
‘황제께서 사형집행을 중지하라는 특명을 내렸소!’
청년은 극적으로 사형을 면했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살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와 세상의 부귀가 주워지더라도 그것이 신앙에 위배되면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이다.’
‘그것이 신앙에 위배되면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이다!’
바로 오늘 우리가 받아야 할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에서 열거한 위인들은 신앙 고백이 분명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고백 보다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베드로가 했던 이 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최후 최고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8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대속물로 내어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이 사랑 앞에서 ‘예수님은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확신에 찬 고백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회색지대에 살지 않으려면
▶둘째, 정체성이 분명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정체성(identity)’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간첩을 아시지요?
손자는 간첩을 향간, 내간, 반간, 사간, 생간 다섯 종류로 나눴습니다.
향간은 적지에 사는 보통사람이며, 내간은 주로 적의 내부에 고위급 인사입니다.
반간은 적의 간첩을 우리편으로 만드는 것이고, 사간은 허위 정보를 적에게 전합니다.
생간은 살아서 돌아와서 정보를 보고합니다.
간첩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양간입니다. 즉 이중간첩 말입니다.
간첩도 나쁜데 이중 간첩은 더 나쁜 것이지요?
먼저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박쥐는 새입니까? 쥐입니까?
동물 나라에서 있었던 전쟁 동화이야기 잘 아시지요? 거기서 박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쟁 중에 자기만 살겠다고 ‘참전하지 않을 핑계’만 대다가 전쟁이 화해로 끝나자 박쥐는 설 곳이 없었다는 이야기의 메시지가 바로 오늘 본문 내용과 맞닿아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42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예수 믿는 사람은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정체성과 관련한 아주 적당한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독수리 알을 암탉에게 품게 했습니다. 독수리는 부화했고 병아리들과 함께 잘 자랐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닭처럼 살아가면서 자신이 닭이라고만 여겼습니다. 벌레를 잡고 풀도 쪼아 먹었습니다. 심지어 닭 울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퍼덕거려 날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다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독수리도 점점 늙어갔습니다. 어느 날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니 커다란 새가 우람한 날개를 활짝 펴고 세찬 바람 속에서 우아하고 위풍당당하게 날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늙은 독수리는 경외심을 느끼고 동료 닭에게 물었습니다. ‘저분이 누구지?’
동료 닭이 대답했습니다.
‘응, 저분은 새들의 왕이신 독수리님이야. 저 분은 우리와는 격이 달라’
독수리는 끝까지 자신이 닭이라고 여기다가 죽었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슬픈 뉴스 하나를 접했습니다.
<오늘(27일) 이명박 전 대통령 항소심 재판에 핵심 증인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이 출석했습니다. 이 전 부회장은 이 전 대통령 뇌물 혐의 중 67억 원으로 가장 큰 부분인 삼성의 '다스 소송비 대납' 의혹을 밝힐 핵심 증인입니다.
이 부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 측 요청으로 이건희 회장의 승인을 받아 소송비를 지원해줬다"며 "대통령을 도와주면 삼성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듣던 이 전 대통령이 여러 차례 욕설을 해 검사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재판부는 이 전 대통령에게 증언을 방해하면 법정에서 퇴정당할 수 있다고 경고한 뒤 이 전 대통령 앞에 놓인 마이크를 껐습니다.>
일국의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서 욕설을 했습니다.
저는 지난 대선에서 그 분에게 투표한 사람으로 분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왜 그 분에게 투표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주차 봉사하는 멋진 장로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크리스찬들이 거는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죄송한 말이지만 그 분은 ‘대통령의 자질’도 ‘장로의 자격’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기사를 보고 정말 화가 많이 났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정말 전직 대한민국 대통령이 맞습니까?”
“당신이 정말 교회 장로 맞습니까?”
참으로 부끄럽고 통탄스럽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저는 정치적인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직 대통령이 자신을 뽑아준 국민 앞에서 수의를 입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지요.
전직 대통령이, 현직 교회 장로가 공개된 장소에서 욕설을 하다니요?
손녀 손자가 부끄럽지 않은지 참 의아하고 황당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 장로가 다 저런 줄 알 것이 아닙니까? 아니잖아요? 아니잖아요?
여러분은 미래의 교회 장로들 아닙니까?
저는 요즘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 아프실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영광은 나타내지 못할망정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지 맙시다.
마지막 사사 엘리제사장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97세를 살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블레셋과 싸울 때 법궤를 전장으로 가지고 나가게 하고 자신은 길가 의자에 않자 졸고 있다가 법궤는 빼앗겼고,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았다고 넘어져 쇼크사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삼상4:18)”
엘리 가문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며느리도 출산 중에 이 소식을 듣고 쇼크사 합니다. 그 아들 즉 엘리 손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삼상4:21)”
엘리 대제사장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공인은 가족보다 사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청문회 때 가족 사항도 검증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삼상2:29)” 그
엘리는 대제사장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하나님 보다 자식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한 마디로 엘리는 정체성이 크게 결여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오늘 본문 4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회색은 흰색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백성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목사입니다.
정체성이 분명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회색지대에 살지 않으려면
▶셋째, 상황과 타협하지 않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BC930년경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의 치세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왕상13장).
솔로몬의 죄로 말미암아 왕이 된 여로보암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는 했지만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는 한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 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 게로 돌아가리로다(왕상12:27)'
결국 여로보암은 비상한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비상한 수단'이란 남유다와 ?비슷하게? 신앙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로 '금송아지' 우상입니다.
그는 남쪽 백성을 위하여는 벧엘에 북쪽 백성을 위해서는 단에 산당을 지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종교생활하기가 무척 수월(?)해진 것입니다.
제사장도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바꿔 버렸습니다(왕상12:31).
뿐만이 아니라, 절기도(7월 15일을) 8월 15일로 바꿔버렸습니다.
한마디로 기득권 즉, 권력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성경은 여로보암의 이런 행위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죄가 되었다(왕상12:30)'
그랬습니다. 이 일이 죄가 되어 하나님은 그의 가문을 문을 닫아 버리셨습니다.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13:34).’
그렇다면 여로보암은 왜 이런 어리석음을 범했을까요?
그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자신이 얻은 권력과 명예와 부를 잃을까 두려웠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믿음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왕상13장에서 아주 중요한 두 단어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왕상12:32)'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 월 십오일로 정하고...(왕상12:33)'
바로 <비슷하게>, <자기 마음대로>라는 단어입니다.
여로보암은 ‘상황’과 타협했던 왕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왕의 임직식 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길갈에서 7일간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블레셋이 쳐 들어왔습니다. 백성들은 혼비 백산하여 뿔뿔이 도망합니다. 당황한 사울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에 주관해야 할 제사를 자신이 드린 것입니다. 후에 사무엘이 돌아와 사울에게 묻습니다. 사무엘상 13:12입니다.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은 간단합니다.
‘기다리라!’ ‘하지 말라!’ ‘사랑하라!’
그러나 인간의 반응은 복잡합니다.
‘부득이하여’
우리가 ‘부득이 하게’ 지은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한 마디로 ‘타협의 죄’입니다.
로마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면서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이요 동역자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씨가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참으로 고귀한 죽음 아닙니까?
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리스도인도 세상의 죄와 타협하며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재물을 더 얻기 위해, 더 높은 직분을 얻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명예를 얻으려고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세상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 사람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 죄와 타협할 때,
저와 여러분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죄와 맞서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고난이 두려워 죄에 빠질 때,
저와 여러분은 고난을 달게 받으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결단과 각오를 다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주에 중립 지대란 없다.
어떤 곳에서나 어떤 순간에서나 신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거나
또는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고 있다.”
C.S.루이스의 말입니다.
가룟유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바로 중간지대(회색지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두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베드로도 중간지대에 서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던 모습이나, 계집종의 질문에 예수님을 저주하며 변명 하던 베드로의 모습은 정말 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한 후 베드로는 180도 변화됩니다.
사도행전4장 대제사장 앞에서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8-19)
이것이 바로 정체성을 가진 제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과의 중간지대! 즉 회색지대에 살지 맙시다.
'비슷하게' 살지 맙시다.
'편법'으로 살지 맙시다.
세상과 타협하고, 상황과 타협하며 살지 맙시다.
'오직 믿음‘으로 삽시다.
가장 초라한 사람은 중간지대에서 '머뭇거리는 인생'입니다.
출교 두려워서 사람의 영광을 취했던 관원들처럼 살지 말고
분명한 <신앙고백>과 <정체성>을 가진 제자로 당당히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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