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복음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본질이요 중심이라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왜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으셔야 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해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죄 사함을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유일한 방법 ‘십자가’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참으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습니다.” (히 9:22) 여기서 ‘피 흘림’이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가 없으면 죄 용서, 죄 사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여러 가지 의미, 능력, 효과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죄 사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또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무소불능하신데 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시는가? 하나님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잔인하게 죽여야 했다면 죄라는 것이 하나님보다 더 능력이 있다는 말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죄의 문제는 인간의 주변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이 죄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몸속에 암세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암세포는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하지 않으면 시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죽게 됩니다. 암세포를 제거하든지, 다른 치료를 받든지, 죽든지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 삶, 축복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럼 인간의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지만 하나님은 단 한 가지 방법만을 제시하십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이런 관점으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의 굴레를 벗어버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도덕, 철학, 윤리, 종교, 사상, 선행 등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아니, 할수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의냐 사랑이냐 죄의 문제는 단순하고 유치하게 생각하는데 함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죄를 단순한 잘못, 규범에서 벗어난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죄에 대해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말아라. 죄 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죄는 본능적이고 심리학적 현상이다’라며 신경질을 내기도 합니다. ‘죄를 지었다면 심판을 받고 조금 고생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스스로 집행을 유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는 그렇게 쉽게 용서받고 집행 유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용서받을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 죄를 해결하실 방법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공의, 정의입니다. 이것은 원칙, 규범, 원리, 최종권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불법, 부정, 실수, 부족함, 용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용납한다면 이미 공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고발, 비판, 정죄, 심판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용서받을 기회도, 가능성도, 은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쉽게 생각하는 인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냥 용서해 주시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공의가 무너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작은 죄 하나도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간단합니다. 죽습니다. 심판받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일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인간에겐 어떤 가능성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하나님께는 공의의 성품도 있지만 사랑과 용서의 성품도 있습니다. 사랑, 용서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크고 흉악한 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무조건 용서하고 무한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에서 인간은 용서받을 가능성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관점에서는 어떤 흉악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백퍼센트 사랑하고 용납하십니다.
십자가로 완성한 공의
하나님은 스스로 공의를 무너뜨릴 수도 없고, 사랑을 무너뜨릴 수도 없습니다. 인간을 죽이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너지고, 인간을 살리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까요? 하나님의 해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 대신 죽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죄는 인간이 지었지만 죽음은 하나님이 치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도, 사랑도 만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숨기지 마십시오. 하나님 스스로 죽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감정적이거나 의지적이거나 지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는 희생, 포기를 포함합니다. 우리의 사랑, 정의와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참 정의는 없습니다. 심판하고 고발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진정한 정의가 되려면 그 안에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죽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제를 하고, 긍휼을 베풀고, 선행을 하고, 남을 도와줍니다. 이것은 불쌍하다는 감정, 머리에서 나오는 지성, 결단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늘 인간의 관점으로 십자가를 봤습니다. 땅에서만 십자가를 봤기 때문에 참 십자가를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늘에서 봐야 합니다. 인간은 ‘죄인’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존 스토트에 의하면 죄는 헬라어로 다섯 가지 말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마르티야’는 표적에서 벗어난 것, 목표에 이르지 못한 것, 목적에 이탈한 것입니다. ‘아디카’는 불의나 부정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포내리아’는 사악하고 부패한 종류의 악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파라르시스’는 침입, 침해,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아밀리아’는 불법, 무법, 탈법 등 법을 넘어설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죄라는 단어 하나에도 다양한 말과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악한 행동이나 악한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 자체가 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한 현상, 수많은 단어 속에 한 가지 단어만 죄라고 하면서 ‘죄는 큰 문제가 아니다’, ‘혹시 있다고 해도 뺨 한 대나 곤장 한 대 맞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단순하게 생각해 버립니다. 특히 현대인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항하고, 하나님을 욕보이는 인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에게는 죄 의식도 없고, 죄 감각도 없습니다. 오직 죄의 현상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서로 고발하고, 죽이고, 경쟁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짐승 이상으로 잔인할 수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화장을 해도 우리가 매일 뉴스, 신문, 소설, 영화에서 보는 사건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 스스로 구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선행, 휴머니즘, 철학 등으로 구원해 보려는 모든 행위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두 가지 필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인간이 아닌 분이 구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인간이 아닌 분이 구원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을 구원해야 합니다. 죄인을 위해 죽은 하나님 하나님의 공의, 사랑을 만족시키면서 인간 밖에서 인간을 구원해야 한다는 문제의 해답은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늘을 봐도 인간 구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십자가요, 땅을 봐도 죄인인 인간 실존에 대한 해답은 십자가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롬 5:8) 오랫동안 예수를 믿지 못하던 사람이 이 성경구절을 읽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예수를 믿은 사건이 있을 정도로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구절에 네 가지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죄인’, ‘죽으심’, ‘사랑’, ‘나타내셨다’입니다. 이 말들을 정리해보면 ‘죄인인 인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나타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에서 확실히 구원받을 것입니다.”(롬 5:9)
이 말씀에도 네 가지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니’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진노를 무섭고 두렵고 억울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정당한 것입니다. 오히려 진노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는 것이 불의한 것입니다. ‘확실히 구원받을 것’은 진노 중에서 받을 구원은 확실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십자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됐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인해 그분과 화목하게 됐으니 화목하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확실히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롬 5:10) 여기에도 네 가지 용어가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됐을 때’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친했는데 억울하게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고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은 십자가입니다. ‘화목’은 사랑, 용서, 화해를 말합니다. ‘확실히 구원을 받을 것’은 반드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나중문제입니다. 먼저 사실로, 진리로, 논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하면 논쟁을 하게 됩니다. ‘1+1=2’는 감정적으로 논쟁할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 사랑도 받아들여야 하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가 내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야 십자가가 십자가가 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롬 5:11)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두 가지 선언으로 결론짓습니다. 첫째, 죄 사함의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킨 사건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죄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죄 사함의 선언입니다. 둘째, 기쁨의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따라서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장송곡이 아니라 개선가입니다. 부활입니다. 십자가에서 부르는 개선가 로마서는 인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기록되기를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두 곁길로 행해 다 쓸모없게 됐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려 있는 무덤이고 혀로는 거짓말만 일삼으며 그들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하다.”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데 민첩하며 그들의 길에는 파멸과 참담함이 있어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롬 3:10~18)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인류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만들어 낸 책을 보십시오. 소설을 보십시오. 다 이 주제입니다. 영화, 다큐멘터리를 보십시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추악하고 무서운 존재인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만신창이가 된 인간을 구원할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공의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땅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깨닫고 감사하십시오.
기도합시다.
하나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죽을 뻔 했던 우리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를 바로 깨닫고, 바로 이해하고바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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