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이사야서 설교를 마치고나서 무슨 설교를 할까 계속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사야서 다음에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라고 하시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오늘날의 기독교는 화려하지만 내용이 알차지 못하고 능력이 점점 쇠퇴해가는 것 같습니다. 덩치는 크고 폼은 좋은데 내실이 없어 기독교는 이 세상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기독교가 이렇게 점점 무기력해지는 것일까요?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바꾼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성경을 믿고, 참 복음을 믿는 그것이 순수해지지 않고 형식적, 습관적이 돼 가고 있습니다. 복음의 변질은 십자가의 변질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요 핵심이요 상징이요 구심점입니다. 구심점이 분명하지 않으면 제멋대로입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는 성도 수가 많아지고, 건물은 커졌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탄생한 1세기에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걸림돌,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를 기독교의 자랑, 상징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으로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충격은 재해석을 가져왔습니다.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구나. 십자가는 그냥 죄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구나. 조롱하고 욕을 하고 모든 비난을 쏟아놓을 대상이 아니구나.’ 이렇게 그들은 십자가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험한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었고, 모든 기독교행사에, 설교에, 성만찬에, 예배에, 기도에 항상 십자가를 중심에 놓았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중심성입니다. 역사, 신앙, 예배, 설교, 기도, 믿음, 찬송 등 모든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마치 죽었던 나무가 살아난 것처럼 저주가 아니라 능력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싹이 나고, 가지가 뻗고, 열매가 맺히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는 ‘본질’
이것이 초대교회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꺼리고 싫어했지만 초대교회는 목숨을 걸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한 세대가 가고, 두 세대가 오고 초대교회가 세워지면서 기독교 교회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오래되면 형식화 되고 낡아집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초대교회를 강타하고,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이끌었는데 제도화, 교리화, 형식화되면서 능력이 점점 사라졌습니다. 고대 기독교 유적지에 가보면 십자가가 없는 건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강단도 십자가형으로 만들고, 무덤도 비석도 십자가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있는데 능력이 사라졌을 때 한 명의 영적 거인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초점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다시 탈환했기 때문에 칼빈, 쯔빙글리 등 종교개혁자들이 힘을 모아 큰 종교개혁의 물결을 일으켜서 다시 교회가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답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업에, 결혼생활에, 인생에 문제가 있습니까? 본질을 떠나지 마십시오. 핵심, 본질로 돌아오면 해답이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를 대신하는 것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믿음, 성령님, 리더십, 선교, 비전 등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십자가 없는 성령님, 구원, 은사, 기적, 선교, 리더십, 봉사는 화려할 것 같지만 내용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실합니다. 핵심이 없습니다. 우물은 있는데 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온누리교회는 사역이 너무 많아서 마치 ‘사역공화국’ 같습니다. 그러나 온누리교회는 사역하는 교회가 아니라 큐티하는 교회요, 일대일하는 교회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내면적 관계가 무너지면 아무리 잘되어도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십자가가 그런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갈등
초대교회에도 십자가 문제가 생긴 교회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상황은 오늘날 현대 교회와 비슷합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고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연합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고전 1:10) 이 말씀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 분열과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고, 비전을 받고 기쁨에 충만한 나머지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담임목사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교인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에 얼마나 생생하고 은혜로운 일들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결론은 ‘그런 교회도 싸운다’입니다. 왜 싸웠을까요? “내 형제들이여,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 여러분에 대한 말, 곧 여러분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고전 1:11) ‘듣자하니 겉으로는 할렐루야하면서 뒤에서는 파벌싸움하고 있구나’는 말입니다.
왜 다툼이 생길까요? 계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계파가 생길까요? 이익과 권력 때문입니다. 누구 편에 서면, 누구 줄에 서면 성공할 것이다, 국회의원이 될 것이다, 이런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는 누구 편인가가 중요하지 정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초대교회에도 생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제각기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게바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1:12) 고린도 교인들은 당을 지었습니다. 학교, 지역, 전공 등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뭉쳐서 인맥을 만들고 ‘나는 바울파다, 나는 바나바파다. 나는 베드로파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리스도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싫은 사람들이 모인 듯합니다.
분노하는 바울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갑자기 목소리를 높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게 말이 되느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 모였는데 그 안에서도 형제, 자매가 서로 파를 나누고, 사람 따라다니고, 반목질시하고, 비판할 수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제일 먼저 자기 이름으로 파를 만든 사람들을 향해 쓴소리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눠졌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 가운데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내가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또한 스데바나의 집안사람들에게도 세례를 주었으나 그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준 기억이 없습니다.” (고전 1:13~16) 아마도 교회 안에서 누구한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른 파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으니까 죽도록 바울에게 충성한다’는 식으로 믿음 이외에 인간적인 체면이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이 말합니다. 세례 받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도록 하셨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고전 1:17)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나를 세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세례를 줄 때 물에 담그느냐 담그지 않느냐는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로교에서 받은 세례는 잘못된 것이니까 물에 들어갔다 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든, 물을 뿌리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행을 할 때 자기는 꼭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리지널이니까 꼭 거기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요단강 물을 병에 담아 가서 그 물로 세례를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단강 물이나 한강 물이나 수돗물이나 다 똑 같습니다. 물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효험은 물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요 복음입니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십자가
중요하지 않는 것은 통과 시키십시오. 그것은 없어도 삽니다. 그러나 예수는 없으면 안 됩니다. 복음은 없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성령은 하나의 감정, 신비주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기적 자체가 종교는 아닙니다. 기적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많습니다. 기적은 사인에 불과합니다. 본질이 중요합니다. 생명력이 없는 씨앗은 아무리 기다려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무정란은 아무리 품어도 부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기도에는 십자가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삶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피와 살이 되었습니까? 내 노래, 내 비전이 되었습니까? 내가 외쳐야할 메시지가 되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말의 지혜로 전하는 십자가는 헛된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지혜, 지식, 이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사람의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인간의 지식, 지혜, 방법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십자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지혜로만 이 영광스런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 아무 능력이 없던 하나의 나무 십자가가 깨달아지고 이해되어지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록되기를 “내가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사람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고전 1:18~19) 이 세상은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로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사상에서 나옵니다. 십자가는 사상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철학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는 십자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지혜로만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지혜는 높게 여기면서도 하나님의 지혜는 우습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인 것이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사람들의 총명을 폐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알아듣습니까? 성령받은 사람이 알아듣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을 받아들인 사람의 눈에 십자가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대의 변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고전 1:20) 우리는 여기서 아주 예리하게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대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학과 학문은 사람의 지혜로 깨달아지는 것이지만 십자가와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로 깨달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영광스러운 십자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자신의 지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보이는 말씀 선포를 통해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고전 1:21) 참 하나님도 답답합니다. 멋지게 지성적으로, 학문적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아무리 파보아도 알 수 없으니까 저처럼 어수룩한 사람이 설교를 해서 그것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알고, 큐티를 통해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것이 유대 사람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며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1:22~24)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학문과 철학을 좋아하는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단어가 하나 나오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요 수치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이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연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25)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차서 십자가가 깨달아지고 보이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여러분의 죄를 이기고, 그 능력이 용서를 만들어내고, 그 능력이 화해를 만들어내고, 화목을 만들어내고, 여러분의 인생을 뒤바꿔놓는 그런 기적과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그것이 어리석게 보여도 하나님의 지혜로
그것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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