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십자가의 복음과 4가지 그림언어

새벽지기1 2019. 3. 22. 07:03


십자가의 역할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인류의 죄를 씻은 것입니다. 둘째, 사탄의 정사와 권세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공짜로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무소부재하시고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이시라도 이것을 위해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림언어로 말하는 복음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희생하지 않는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는 공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속이나 대속도 다 공짜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과 마가복음 10장 45절 말씀을 보면 ‘대속물’이 ‘치를 몸값’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은 한결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었다고 말합니다(딤전 2:6, 갈 1:4, 히 9:15). 우리는 과속을 하거나 주차를 잘못하면 범칙금을 냅니다. 돈을 내서 죄를 갚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이런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총 66권입니다. 그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고, 바울서신이나 다른 서신서는 사복음서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요약한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의 목적은 멸망,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 이 핵심사상-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속물로 오셨다-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십자가 사상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네 가지 그림언어로 설명합니다. 그림언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많이 경험하는 일, 상황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말을 하면 잊혀도 이미지로 설명하면 잊히지 않습니다. 저도 설교할 때 개념을 이미지화 시켜서 성도들이 상상하도록 합니다. 이 그림언어를 통해 여러분이 다시 살아나고 벅찬 감동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사함 - 제물로 드림 


첫째, 제사를 드릴 때의 화목제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많이 경험한 것이 제사입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제물에 대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었습니다. 제물이 없는 제사는 없습니다. 그것이 소든 양이든 비둘기든 상관없이 제물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의 피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과거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그분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롬 3:25) 이 제물을 바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누구에게 바쳤습니까?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제물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나님 자신을 죽여서 바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돈으로 사거나 매를 맞거나 고문을 당하는 것으로는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천천히 묵상하면 기절할 만큼 충격을 받습니다. 나를 위해서 내 자녀가 죽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이요, 자녀를 위해서 부모가 죽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속하는 화목제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죄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제물이십니다.” (요일 2:2) 이것은 제사법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 개인을 위한 제물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을 위한 제물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단 위에서 제물이 피를 흘리고, 소리 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을 당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창에 찔리는 모습과 같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양심에, 도덕에, 영혼에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은 은이나 금도 아니요, 양이나 소와 같은 짐승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류의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벧전 1:18~19). 제물은 제단 위에서 칼로 몸과 내장까지 찢겨서 피를 흘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피를 흘리셨습니다. 왜 피를 흘려야 했을까요? 피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레 17:11).


화목제물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십자가의 핵심은 십자가에 흘리신 피입니다. 고난이나 조롱은 부가적인 것입니다. 피가 뿌려지지 않았다면 죄도 사라지지도 않았고 생명을 얻지도 못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요일 4:10)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줄 압니다. 내가 헌금을 하고, 내가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크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려야겠는데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만 말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이 그림이 너무나 선명하고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해방 - 대가를 지불  


둘째,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매일 시장에 가서 야채, 고기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삽니다. 물건을 그냥 갖고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드시 물건에 대한 값을 치릅니다. 값을 치른 물건은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건을 산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아, 내가 돈을 냈으니까 이 물건은 이제 내 것이구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구나’라고 빨리 알아듣습니다.그러나 구약 시대 시장은 물건뿐만 아니라 제사를 위한 동물과 노예도 사고팔았습니다. 자기가 산 노예를 풀어주는 것은 주인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물건을 살 때 돈을 지불하듯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돈을 지불하셨다고 그림언어로 설명합니다. 이것을 ‘속전(贖錢)’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누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까. ‘아, 나를 예수님이 사셨구나. 난 예수님 것이구나. 노예에서 벗어났구나.’ 이제 우리는 마귀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사탄의 노리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는데 이것은 적절한 때 주어진 증거다.”(딤전 2:5~6) 이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다고 할 때 이런 그림을 갖고 계십니까?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나를 사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누리고 체험하십시오.  


칭의 - 무죄 선언 


셋째, 재판정에서 판사의 판결 선언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재판에 익숙했습니다. 다툼이 일어나면 누가 옳은지 판결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재판정은 익숙한 생활공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고발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실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죄는 사형에 해당되지만 무죄다”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을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는 사형에 해당되지만 예수님께서 죄의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죄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 하시고, 선하지 않은데 선하다 하시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데 용서받은 죄인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죄사함의 선언을 하셨고, 예수님은 그 선언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선언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칭의’라는 말은 너무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칭의’와 비슷한 개념의 말이 있습니다. ‘성화(聖化)’입니다. 칭의는 재판장이 무죄를 선언한 순간부터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는 평생 걸리는 일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면서도 가장 다른 개념입니다.


탈북자가 대한민국에 오면 대한민국 국민이 되지만 이 사람이 대한민국 생활에 적응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실수도 하고 이해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천국 생활은 너무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습니다. 사기치고 욕을 하던 사람이 축복을 하려니까 힘이 드는 것입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던 사람이 인격적으로 말하려니까 주먹이 근질근질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죄인의 삶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문화충격을 받듯이 천국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20~3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무 충격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성질부리고 자기 멋대로 삽니다. 이름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칭의가 있을지는 몰라도 성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칭의가 내게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피 값을 치르셨지만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믿음이 나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만듭니다. 찡그릴 것도 없고 소리 지를 것도 없습니다.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이해하십시오. ‘일 더하기 일은 이입니다’는 크게 소리를 쳐도, 작게 중얼거려도 변함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을 정리해 봅시다.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수단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중요하지만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결과는 거듭남입니다. 중생입니다. 마지막 열매는 새하늘과 새땅, 새 예루살렘입니다.  


화해 - 희생의 삶 


지금까지 제사를 드릴 때의 화목제물, 시장에서 노예를 산 속전, 재판정에서의 칭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족관계입니다. 가족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화해입니다. 화목과 화해는 다릅니다. 화목은 이미 뜻이 맞고 정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화해는 갈등, 미움, 원수가 된 상태를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친척 간에, 부부 간에 화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십시오. 새것이 됐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고후 5:17~19)여기서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이 ‘화해’입니다. 이 말씀에는 화해의 순서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웃(가족)과 화해, 자신과 화해, 자연과 화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책은 화해자입니다.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 (마 5:9)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니 자기의 육체로 둘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된 것을 헐어 내셨고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그분 안에서 이 둘로 한 새 사람을 창조해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자기 안에서 원수된 것을 없애 버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셔서 먼 데 있는 여러분에게 화평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평을 전하셨습니다.”(엡 2:14~17) 할렐루야!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친히 화해자가 되셨습니다. 화목제물도, 구원도, 칭의도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희생해야 하고 손해를 봐야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화해입니다. 갈등의 벽을 넘어서서 누군가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화해는 소리를 지른다고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화해자라고 나서서 말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손해 보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면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피투성이가 될 만큼 희생해야 합니다. 손해를 봐야 합니다. 져줘야 합니다. 돈을 써야 합니다.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화해가 이뤄집니다. 화해자가 치러야 할 것은 대가요 희생입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이 온 인류의 갈등을 자신의 죽음으로 화해시키셨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화해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정말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갈등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희생하며 헌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