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립보서 1:19~30)

새벽지기1 2018. 7. 9. 08:31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

 

결코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 삶이란 무엇인가?’ 이고, 또 하나는 ‘ 죽음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에만 답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 없이 삶을 살아갑니다. 고귀하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면서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한 지식과 확신이 없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답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대답하려면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 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대사입니다. 비평가들은 이 대사를 삶과 죽음에 대한 망설임, 우유부단함, 확신이 없는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의 삶의 확신을 흔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기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은데 또 죽자니 망설여지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삶에 대한 확신이 없고,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신도 없는 것을 두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삶을 돈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파산입니다. 삶을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괴로움입니다. 삶을 권력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연약함과 나약함입니다. 삶을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더러움이며 추함입니다. 이 질문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어야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질문에 확신 있는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사도 바울이 삶과 죽음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거울이 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21절).

이 고백은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죽음 이후에 구원받는 차원을 넘어서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누군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가장 정확한 대답이 무엇일까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전체가 “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을 설명해줍니다.

로마서 5장까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되시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속의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6장으로 넘어가면 그 사건을 우리의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로마서 5장이 하나님의 각도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했다면 로마서 6장은 우리의 관점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대속제물로 내어준 사건이고, 로마서 6장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입니다.

로마서 6장에 ‘ 함께’ 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로마서 6장 전체가 예수님과 우리의 십자가 경험입니다. 로마서는 5장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역사적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부활이요, 승천이요, 재림입니다. ‘함께’ 라는 단어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이 담겨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우리가 하늘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다시 재림의 때에 주와 함께 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시작되는 사건들을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우리가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 우리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갈라디아서의 고백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부활하셨음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라는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살아있고, 내가 예수님을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의탁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의 의지와 판단이 살아있고, 내가 누군가를 믿어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께 나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몇 마디 고백밖에 할 수 없다면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

사도 바울은 지금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서있습니다. 로마감옥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지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는 두려움과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항상 그랬듯이 지금도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20~21절).

사도 바울은 로마법정의 판결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삶과 죽음이 그들에게 달린 것처럼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았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내 몸을 통해 위대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내게 사는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 안에 사는 이것이 내게 열매 맺을 일이라면 내가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훨씬 더 좋습니다”(22~23절).

사도 바울에게 죽음은 삶보다 훨씬 좋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죽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삶의 고통과 고난을 피하고 싶은 생각으로 죽음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혀 죽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처럼 자존심이 상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깊은 고난 속에서 “차라리 나를 무덤 속에 숨겨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고난에 눌려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훨씬 낫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은 그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삶보다 좋은 이유

 

사도 바울이 죽음이 삶보다 훨씬 좋다고 고백한 이유는 죽음을 통해 죄로부터 온전히 자유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우고 갈등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일지라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죄의 소욕으로 갈등하는 번민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죽음을 통해 죄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죽음이 삶보다 더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삶보다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갈뿐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나그네가 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그네 됨을 강조하셨습니다. 율법에 “땅을 영원히 소유하지 말 것은 너희가 나그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을 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5).

우리 모두는 이 땅의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로 살다가 죽음을 통해 영원한 본향으로, 영원한 거주지로 들어갑니다. 여러분, 일시적인 체류지가 좋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거주지가 좋습니까? 이 땅에서 아무리 훌륭한 집을 지어도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미라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 영원히 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원한 거류민은 아무도 없습니다.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영원히 거할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요, 거류민일 뿐입니다.

죽음이 삶보다 좋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본문에 나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고후 5:8).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고백하는 삶은 주와 함께 사는 것이 훨씬 좋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 때도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삶을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지만 그때는 대면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수건을 쓰고 있지만 그때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영광스러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삶보다 훨씬 좋습니다.

이 땅의 삶이 죽음 이후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오해입니다. 편견이요, 진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삶보다 훨씬 좋으니까 모두가 빨리 죽기를 소망하고, 삶속에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참된 신앙입니까.

 

 

삶은 죽음보다 더 필요한 것

 

사도 바울은 죽음을 삶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삶은 죽음보다 더 필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죽기보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더 찾았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죽음이 삶보다 훨씬 더 좋다는 것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 내가 육신에 머무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내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고 함께할 것을 확신합니다. 이는 내가 여러분에게 다시 갈 때 나로 인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24~26절).

24절 초반부에 보면 “내가 여러분을 위해 육신에 머무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삶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이 삶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인데 빨리 죽지 않고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자신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삶보다 좋은 것이고, 삶은 죽음보다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과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유익하게 되는 것이 두 번째이고, 자신의 삶과 죽음은 세 번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이것은 내가 가서 여러분을 보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성령 안에 굳건히 서서 한마음으로 복음 안에서의 믿음 생활을 위해 함께 달려 나간다는 소식을 듣기 위함이며 또한 대적자들의 그 어떤 엄포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27~28일).

사도 바울이 사는 이유는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입니까. 어떤 규칙, 규율, 제도를 만들어서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가 복음입니다.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가 복음이고, 그 고백대로 사는 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개개인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고백하면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고백으로 살아갈 때 반드시 고난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주권과 다스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하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대적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할 책임, 곧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할 책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나와 동일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내 안에서 보았고 아직도 내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29~30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고난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려고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면 고난도 이기고, 죽음도 이깁니다. 우리의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바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우리가 쌓아놓으려고 했던 것, 우리가 의지했던 것, 우리가 바라보았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립니다. 그래서 정말 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내게 사는 것이 나였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였는지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증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더 좋은 것과 더 필요한 것

 

사도 바울은 좋은 것과 더 필요한 것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더 좋은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동시에 자신에게 더 필요한 삶을 통해 성도들을 섬기기를 소망했습니다. 만일 그가 더 좋은 것을 소망하지 않고 더 필요한 것만 소망한다면 현실에 파묻혀 방향을 잃었을 것입니다. 만일 더 필요한 것을 소망하지 않고 더 좋은 것만을 소망한다면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이고, 도피적인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이 힘들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병을 이길 이유가 있습니다.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섬기고, 누군가의 믿음의 진보를 이루고,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왔습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드러낼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것과 더 필요한 것 사이에 끼어 사는 인생입니다. 죽는 것이 분명히 더 좋은 것이지만,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을 소망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소망하는 것이고, 더 필요한 것을 소망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바로 보여주는 삶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고,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게 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음은 삶보다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