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다 (빌립보서 1:1~8)

새벽지기1 2018. 3. 14. 07:27


“복음의 코이노니아, 은혜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하십시오.
믿음이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해질 것입니다.”

 

신약의 초대교회 중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13개의 서신서를 비교해보면 그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각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들에 대한 처방, 교훈, 권면들이 주요 내용입니다. 그의 서신을 보면 당시 교회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와 로마교회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혼란스럽게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은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사도 바울이 책망하고, 지적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격앙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많은 분열과 다툼과 영적 타락이 있었습니다. 1장부터 다툼과 분열로 얼룩진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당시 이단으로 치우치고 있던 교회를 경계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서는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잘못된 교훈에 빠진 자들을 교정하는 책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각양각색의 문제에 대한 지적과 권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 시대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책망과 지적이 가장 적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와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게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교회 성도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여러분 모두를 위해 항상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합니다”(3~4절).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십니다”(8절).

8절에 ‘ 마음으로’ 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가 개역개정에는 ‘ 심장으로’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직역하면 ‘ 내장’ 입니다. 내장(Splanchnic)이라는 독특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시대 사람들은 온 몸을 사로잡는 강렬한 감정이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이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을 때도 ‘ Splanchnic’ 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내장에서부터 끌어 나오는 사랑, 온몸을 사로잡는 강렬한 동정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많은 교회들 가운데 빌립보교회를 향해서만 이 단어를 썼습니다. 편애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예수님 앞에 바로서고,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토록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사랑과 감사는 빌립보교회 성도들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사도 바울의 마음속으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빌립보서에는 우리가 잘 아는 신앙고백과 찬양들이 많이 나옵니다. 1장 21절에서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고, 2장에서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성육신 하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고백했습니다. 3장에서는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김은 내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했고, 4장에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풍족하나 가난하나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자족함을 배웠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감금된 상태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사도 바울은 찾아오는 이는 맞이할 수 있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는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담대히 증거한 기간에 쓴 책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그는 그런 상태에서 가장 충만한 신앙고백을 하고, 기쁨의 고백을 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몇 가지 실제적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끊임없이 보내준 선교헌금과 사역에 감사하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외부적으로는 거짓교훈을, 내부적으로는 분열과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지만 전반적으로 빌립보서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충만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4장이라는 짧은 책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16번이나 등장합니다. 기쁨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빌 4:4)

이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기쁨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 안에 기쁨의 열매가 충만하게 흘러나옵니다.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충만하게 나누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각 장마다 복음의 능력이 가져다주는 기쁨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은 환경과 고난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 2장은 우리의 연약함, 인간적인 갈등, 분열을 뛰어 넘는 기쁨, 3장은 거짓교훈이 앗아갈 수 없는 기쁨, 4장은 경제적인 형편 같은 삶의 긴장이 빼앗아 갈수 없는 기쁨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사도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1~2절).

이 인사말 속에는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설명하는 세 가지 단어가 등장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 그리스도 예수의 종’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서에서는 자신을 ‘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 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로마서와 디도서에서는 종과 사도를 함께 썼습니다. 사도는 영어로 ‘ Apostle’ 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 서신서를 쓸 때마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을 가장 먼저 강조했을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의 직책에 대한 집착이 아닙니다. 그가 전한 복음의 권위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손상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핍박자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는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가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느냐는 오해를 받았고,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베드로나 야고보만 사도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려고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 이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그냥 바울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도 바울이라고 부릅니다. 베드로를 부를 때 사도 베드로, 야고보를 사도 야고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름만 부르는데 바울만 사도 바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 만큼은 사도라는 직책을 쓰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 예수의 종’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고 싶었던 단어일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해도 오해하지 않고,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맛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종 됨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종이라고 쓰이는 다른 단어가 있었습니다. ‘ 둘로스’ 인데 노예라는 뜻입니다. 집에서 일하는 종보다 훨씬 비천한 존재입니다. 노예선에서 배를 젓고, 심한 육체노동을 하는 노예를 의미합니다. 사회적 신분도 보장받지 못하고, 물건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쓰이던 단어가 바로 ‘ 둘로스’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 그리스도의 노예’ 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이 고백을 우리가 마음속 깊이 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

 

둘째,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도라는 단어만큼 익숙하지만 잘못 이해하고, 소홀이 여기는 단어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구별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목적에 의해서 불러냄을 받아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업적과 공로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롭게 함으로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대에 잃어버린 단어가 성도들입니다. 평신도라는 단어는 종교개혁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가톨릭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사실 평신도라는 단어는 사라져야 합니다. 평신도라는 단어 속에 가톨릭적인 계급의식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직분도 성도들이라는 호칭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누가 감독이요, 누가 집사여야 합니까. 성숙한 성도여야 합니다. 성도다운 성도여야 합니다.

셋째,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평강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평강은 언제나 은혜 뒤에 따라 나옵니다. 평강은 은혜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옵니다. 평강은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는 내적인 능력입니다. 이 은혜와 평강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종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날마다 누리는 자들입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뻐했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에 동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성취하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모두에 대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내가 여러분을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슬에 매였을 때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나 여러분 모두가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5~7절).

중요한 단어가 ‘ 동참’ 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 참여’ 라고 번역했고, 개역성경에서는 ‘ 복음 안에서 교제’ 라고 번역했습니다. 동참, 참여, 교제라고 번역된 원어는 ‘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가볍게 번역된 것이 사실입니다. 따뜻한 차 마시면서, 음식을 나누면서, 대화를 나누고, 덕담을 나누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코이노니아는 고통을 함께 분담하는 파트너, 협력자, 경제적, 육체적,정신적 부담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더 깊은 의미가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코이노니아입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에 참여했다는 것은 복음이 증거 됨에 있어서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함께 분담하고,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고통을 함께 분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코이노니아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과 함께 고통을 분담해서 복음의 역사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계속 추적했습니다. 당시에는 사도 바울의 소식을 알려면 누군가 가야

만 했고, 누군가 와야만 했습니다. ‘ 에바브로디도’ 라는 사람은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사도 바울에게 헌금을 전해주려고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코이노니아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빌립보교회가 세워질 때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집중적으로 전도하려는 사도 바울을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 마케도니아로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하고, 그의 가족이 구원받게 하고, 성문밖에 강가에서 여인들을 만나 전도하게 하시고,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귀신들린 여종을 내쫓았더니 오히려 그 주인들이 사도 바울을 모함해서 감옥에 가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했더니 감옥문이 열리고, 간수 가족이 구원받는 역사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빌립보교회는 루디아 여인의 가족과 빌립보 간수의 가족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날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복음의 코이노니아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슬에 매였을 때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나 여러분 모두가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7절).

5절에서는 복음에 동참했다고 했고, 7절에서는 은혜에 동참했다고 했습니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은혜는 코이노니아를 통해 더욱 풍성하게 흘러갑니다. 내 것을 나누면서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갇혔을 때나 복음을 전할 때나 사도 바울과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관계를 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이 흘러넘쳤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온전히 이루신다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성취하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6절).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코이노니아를 보면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한 일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시작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온전히 이루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영원한 완전이요, 보장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이 내게 주신 모든 사람들 중한 사람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 6:39).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요 10:28).

여러분, 구원의 확신은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 믿음의 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하나님이 온전히 이루신다는 것을 바라보는 확신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책임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이루실 것을 믿는 자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견고하게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처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굳게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히3:14).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 안에 거하고 튼튼한 터 위에 굳게 서서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은 천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됐고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됐습니다”(골 1:23).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온전히 이루신다는 확신은 우리를 믿음 안에서 굳게 서게 합니다. 그 확신이 우리를 게으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부지런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온전히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를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빌립보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루실 선한 일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함께 참여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것을 끝까지 이루실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코이노니아에 참여하십시오. 복음의 코이노니아, 은혜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함으로 믿음이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충만해질 것입니다. 더욱 힘써 믿음을 굳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