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격려하고 힘을 주어라 (신명기 3:21~29)

새벽지기1 2018. 7. 10. 07:26


“누군가를 격려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위대함을 넘어 선한 삶으로 쓰임 받으십시오.”

 

<Good to great>라는 책은 오랫동안 기업과 리더십분야의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한 교수가 쓴 책입니다. 신앙적인관점으로 이 책의 제목을 바꿔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 Good to great’ 는 좋은 기업을 넘어서 위대한 기업이 되라는 메시지인데 이것을 ‘ Great to good’ 으로 바꿔 읽어야 합니다.위대함을 넘어서 선함으로 나가는 인생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 땅에서 위대해지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삶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 위대한 목자’ 라고 소개하지 않으시고 ‘선한 목자’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의 간청, 하나님의 거절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은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인생이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는 인생에서 그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위대함을 넘어서 정말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선한 지도자로 인생이 마무리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경험하는 마지막 단계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비전을 다음 사람들에게 계승해주고 아름답게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함을 넘어서 선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마지막 단계는 성공이 아니라 계승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계속 이어가도록 계승하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만약 다음 세대가 비전과 일을 이어나가는 일을 실패한다면 선한 지도자라고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실패해서 선한 지도자라 부르기 어려운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잊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용기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마지막에 넘어야 될 산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을남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바르게 헌신된 사람이라면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오직 당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만을 나타내기 위하여 모세를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 3장 후반부에 나오는 사건이 그래서 생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개인적인 간청을 하나님이 단호하게 거절하시는 내용입니다. 모세의 개인적인 간청은 자신도 백성들처럼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생하며 백성들을 이끈 지도자 모세에게 최소한의 보상으로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고생한 모세가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을 직접 밟을 수 있는 감동을 주시는 것이 합당한 조치처럼 보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많은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몇 번이고 진멸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중보기도 한 덕분에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모세 자신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한 첫 번째 기도이자 마지막 기도입니다. 수많은 중보기도를 하나님앞에 드렸던 모세가 자신을 위한 단 한 가지 간청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야속해 보이고, 냉정해보일 만큼 그 간청을 거절하셨습니다.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단 한 번의 간청을 왜 이렇게 냉정하게 거절을 하셨을까요. 가혹하게 보이고,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거절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전체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분밖에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최선이라고 여기는 것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최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볼 때도 최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나의 관점, 경험, 판단으로 볼때는 분명 이것이 최선인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이 모세가 미워서 그의 수고와 노고를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밟는 것보다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주시려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간증하듯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두 가지를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못하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데스 지역을 지날 때 물이 없어서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곳에서 메말라 죽게 하느냐고 불평하고 대항했습니다. 그때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회막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지팡이를 들고 저 바위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내가 물을 주겠다. 그리고 그 물로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물이 없어 목마른 백성들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물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나가서 지팡이를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겠느냐?” 그리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내리쳤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문제로 드러납니다. “그와 아론이 총회를 바위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 너희 불순종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해 이 바위에서 물을 내겠느냐?’ 그러고 나서 모세가 자기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내리치니 물이 많이 쏟아져 나와서 회중과 그들의 가축들이 마셨습니다”(민 20:10~11). 첫째, 모세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바위에서 물을 내겠느냐?’ 라는 말은 마치 자신이 물을 내어 주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물을 주시는 이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물을 내어주는 것처럼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바위에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말에서는 말하라고 했고, 개역개정에서는 명하라고 했는데 모세는 바위를 두 번 내리쳤습니다. 문제는 물이 바위를 쳤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행동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물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물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행동은 두 가지 모순이있습니다. 하나는 마치 자신이 물을 주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이 백성들이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을 이해하고 물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모세는 분노했습니다.

 

“이 불순종하는 사람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해 물을 내겠느냐”고하면서 지팡이를 내리쳤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의 중보자요, 대리자입니다. 모세의 말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행동은 곧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엄청나게 진노하셨고, 백성들에게 물을 주시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으면 물만 냈으면 되는데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보이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해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으니 너희가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민20:12). 하나님은 이때 마음을 정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백성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사랑입니다. 메마른 땅에서 백성들에게 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왜곡해서 나타낸 것입니다. 모세를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사건을 잊었는지 기억하는지는 모르지만 잊었기 때문에 간청할 수도 있고,기억했다면 시간이 흘렀으니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을 가능성을 보고 간청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기억하셨습니다. 말씀대로 행하시고, 하나님의 원칙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모세를 그 세대와 함께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엄중한 지를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둘째,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는 여호수아에게 네 직책을 맡기고 그를 격려하고 힘을 주어라. 그가 이 백성들을 이끌어 강을 건너게 하고 네가 볼 그 땅을 그들에게 상속하게 할 것이다”(28절). 모세에게 주어진 마지막 책임은 후임인 여호수아를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 가운데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백성들에게 모세의 인기와 위대함이 하나님보다 깊이 각인될 위험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모세가 나옵니다. 당시는 조상숭배가 팽배해 있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를 신격화하고, 우상처럼 섬길 위험이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주인보다 위대하게 나타나는 것을 결코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가릴 수 있기때문입니다. 모세는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고, 자신을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주께서 주의 종에게 주의 위대하심과 주의 강한 손을 보여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늘이나 땅에 주께서 하시는 그 행위와 강력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신이 어디 있겠습니까?”(24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 일컬었다면 꼭 자신이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이끌고 들어가지 않아도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강하신 능력으로 그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꼭 내가 일해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난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나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을 의지하겠습니까. 모세가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니 모세를 통해서만 일하신다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세보다 덜 위대한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역사하실 수 있기에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도,여호수아를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위대함 넘어 선한 삶으로
하나님이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대신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네 눈으로 그 땅을 보아라. 이는 네가 이 요단강을 건너갈 수 없기 때문이다”(27절). 아니 들어가지도 못하는 땅을 왜 보게 합니까. 만약 모세의 마음이 꼬여있다면 가지도 못하는 땅을 바라봐서 뭐하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뜻과 소원보다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룹니다. 모세는 그 땅을 밟는 것보다 그 땅의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그 땅을 위해 기도하고, 그 땅에 들어갈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더 영광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라는 것은 그 땅을 밟아 더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 것보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백성들을 축복하는 선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목표와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해 섬겼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너는 볼 수는 있지만 들어갈 수는 없다. 네가 이 일을 바라보고 추진했지만 그 일의 성취는 다른 사람이 이룰 수 있다. 너는 그 비전을 보는 사람일 수 있어도 그 비전을 마무리 짓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영역이건 삶이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라고 대꾸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조치에도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것이 선함입니다. 위대한 사역을 이룬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모세처럼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지 못해서 너무나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이 여기까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 땅에 꼭 들어가야 겠다고 불순종했다면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 추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업적은 남겼지만 선한 인생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어떤 것은 바라보기만 하고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 열매를 따지 못한다 할지라도 씨를 뿌리고 물을 줘야 합니다. 마지막 열매를 내가 따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 그 땅의 동서남북을 바라보았을 때 이미 그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순종함이 없다면, 약속의 땅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바라만 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순종하고 있다면 그 땅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여러 번 테러와 암살 위험에 시달렸습니다. 테네시주의 멘피시의 한 연설에서 모세의 마지막 경험을 인용해서 심정을 고백합니다. “저는 지금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힘든 날들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산꼭대기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저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오래 사는 것은 나름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일에 별로 관심 없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산위로 데려가시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위에서 아래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 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우리가 한 민족으로 약속의 땅에 이르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눈은 주님이 오시는 영광을 보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어쩌면 모세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땅을 밟느냐 못 밟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까지인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보는 것까지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그 사람이 그 땅을 밟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것이 선한 삶입니다. 그것이 위대함을 넘어 선한 삶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 땅의 동서남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발로 밟지 않고 눈으로 그 땅을 밟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비전입니다. 동서남북을 눈으로 바라보며 중보기도 한 그대로 백성들과 후대들이 그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비전의 사명이 다음 세대들을 통해 이뤄질 수 있도록, 믿음의 계승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세처럼 비전의 사명을 다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