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부활주일부터 믿음시리즈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네가 보는 고로 나를 믿느냐 보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머리로 이해되지 않지만 믿을 수 있는 믿음이 복된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약속에 기초한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희망의 믿음과 약속에 관한 믿음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희망, 열정, 기대감을 믿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결국 허탈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입니다. 그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그 약속이 해석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약속하셨기에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작은 믿음과 큰 믿음에 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흔들리는 작은 믿음
성경에는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실 때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고 있던 제자들의 배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했고, 제자들은 호수 한 가운데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이 절망에 빠진 것을 보고 기도를 포기하셨습니다. 새벽 3시였기 때문에 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위를 걷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두려워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빨리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으로 착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엉겁결에 “만약에 당신이 주시라면 나를 물위로 걸으라 명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로 뛰어들었고, 놀랍게도 물위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곧 이성과 상식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는 물에 빠졌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허우적거리는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치 물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세상으로, 옛날로,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 순간부터 즐겁고 기쁘고 감동적인 삶이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물에 빠진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저는 믿음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무슨 일을 하자고 하면 ‘저는 믿음이 없습니다’, ‘다음에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은 크게 생각하고 자신의 믿음은 작게 생각합니다. 늘 자신을 믿음의 패배자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네가 나를 보고 따라 오는 동안에는 파도가 쳐도 너는 물위를 걸었고 병이 들어도 너는 내 앞에 왔고 고난이 있어도 축복이 있었는데 너 자신으로 돌아가니까 네 본질로 돌아가니까 물에 빠지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라.”
큰 믿음의 시작
그렇다면 과연 큰 믿음, 위대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설명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한 백부장이 큰 믿음을 설명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8장 5~7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7장까지 위대한 산상설교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올 때였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보자마자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둥병자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시자 문둥병이 순식간에 나았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왜 예수님께 이런 요청을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들리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둥병자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도 예수님을 만나서 내 병을 고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분이 내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문둥병자에게 그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덜컥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둥병자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백부장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내 하인을 고쳐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백부장이 예수님께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하인을 고쳐달라고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로들은 “우리 동네에는 훌륭한 백부장이 한분 계시는데 그분은 정말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유대민족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을 그렇게 사랑하고 우리에게 회당까지 지어주는 그런 분입니다. 이분이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는데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백부장 집으로 가고 있는데 백부장의 친구들이 와서 하는 말이 누가복음 7장 6~8절입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문제는 백부장의 벗들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충격을 받은 사건이 별로 없는데 누가복음 7장 9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에서 본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백부장은 직접 온 것도 아니고 친구를 보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큰 믿음 vs 작은 믿음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큰 믿음과 너무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큰 업적을 남긴 사람, 영웅같은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은 외형적인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교회적으로 평가한다면 건물이 크다거나 성도가 많다거나 사역을 많이 하는 교회를 큰 교회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큰 교회 목사는 큰 목사입니까?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금식하는 사람을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워서 뒤에 숨어서 가슴졸이며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며 헌금하는 가난한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무엇이 진짜입니까? 무엇이 큰 믿음입니까? 우리는 믿음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콤플렉스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고, 나는 신분도 별 볼일 없고, 나는 가진 것도 없이 교회 뒤에서 일하는데 내가 무슨 믿음이 있겠느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야망과 믿음을 혼돈하지 마십시오. 야망이 크다고 큰 믿음이 아닙니다. 열정이 있다고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용기로 따진다면 베드로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자르고 큰소리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믿음입니까? ‘아멘 할렐루야’ 소리가 높다고 큰 믿음입니까? 믿음의 핵심은 신뢰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십니까? 신뢰는 시련으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보통 때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병들어봐야 압니다.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를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빛을 발하는 믿음 성경을 보십시오. 광야로 나간 세례요한, 아기를 낳지 못한 한나, 예언이 거절당한 예레미야 등 믿음의 선조들이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웃음과 조롱소리만 들립니다.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있고 여러분 주변 사람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런 경험을 다윗이 겪었습니다. 다윗은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조국을 떠나서 블레셋에서 방황했습니다. 이산 저산 옮겨 다니는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그때에도 다윗은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순교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고 죽어갈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그 사람을 구하시지 않은 것입니까? 순교자는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영원하심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 70년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성전, 땅, 가족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은 노예로 팔려버렸습니다. 이런 기막힌 상황 속에서도 성전의 회복과 다시 오실 메시아를 믿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싸움입니다. 이 고난 속에서, 이 시련 속에서 이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마음속에서 하늘의 별처럼 태양처럼 떠오르는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자들은 부활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진리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견디기 힘든 시련에서 얻은 대가입니다. 요셉처럼 감옥에 들어갈지라도, 다니엘처럼 풀무불에 들어갈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을 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제 집에 오는 것을 내가 감당 할 수 없습니다. 오시지 마십시오. 오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과 같이 먹고 마시고 설교를 매일 들었고 잠을 잤습니다. 베드로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베드로도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물위를 걷고 있던 베드로가 그의 눈동자를 예수님의 눈에서 파도로 옮겼을 때, 비바람으로 옮겼을 때, 자기 자신으로 옮겼을 때 그는 물에 빠졌습니다. 믿음이란 끝까지 예수님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에 빠졌다가가도 다시 살아나고, 죽었다가도 살아나고, 병들었다가도 살아나고, 없어졌다가도 살아나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입니다.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천년 동안 교회가 존재해왔던 방식입니다. 공산주의, 모슬렘, 수많은 이성주의와 철학이 지나갔지만 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보십시오. 백부장이 한 일은 큰일이 아닙니다.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아니고 세계를 정복한 것도 아닙니다. 백부장에게는 병든 자기 하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한 것 밖에 없습니다. 백부장 사건을 통해서 얻는 교훈은 믿음은 실제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에 하인의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 집에 간 것도 아니고 안수한 것도 아닌데 나은 것입니다. 언제 어느 날 몇 시 몇 분에 일어났느냐는 몰라도 됩니다. 내가 예수님 얼굴 바라보고 가다보니까, 말씀의지하고 가다보니까 어느 날 내가 변한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여러분이 변한 것 아닙니까? 옛날 같으면 신경질 냈을 사람들이 신경질을 내지 않고, 손해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묵묵히 그 길을 갑니다. 할렐루야! 믿음으로 살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어느 때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구하십시오
귀신들린 아이를 가진 부모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할 수 있거든 내 자녀를 고쳐주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그 자녀보다 그 부모를 먼저 고쳐주셨습니다. “네 자식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믿으십시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 고백하는 일입니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주십시오. 나도 이 백부장과 같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결한 순수한 주님을 신뢰하는 이런 믿음을 내가 갖기를 원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이 옮겨지고 하늘이 열리고 바다가 갈라집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할렐루야!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다 이 순결한 믿음을 소유하기를 축원합니다. 이 믿음은 성령이 부어질 때 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성령이 임하시면 믿음이 부어집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믿음이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을 심어주실 것입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아멘!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에게 순결한 믿음,
순도 백퍼센트의 믿음을 주옵소서.
말씀을 의지하고 약속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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