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세원 서정희 부부가 집회에서 한 간증이 제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서정희씨는 중보기도노트를 가지고 5시간에서 7시간을 중보한다는 것입니다. 더 감동적인 것은 서정희 씨는 남편을 위해서 늘 기도하는데 남편이 조폭영화를 만들었을 때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었고, 그 영화가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줍니다.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길을 원하지 않는다고 선포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힐난
오늘 본문은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거듭남과 변화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27~32절입니다.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오늘 말씀을 보면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고 또 다른 부류는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이 두 그룹이 레위라 불리는 세리 한 사람을 놓고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세리’라는 신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리는 유대인이면서도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보낼 세금 외에도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자기 재산을 불렸고, 로마는 이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요 상종치 못할 인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야 말로 죄인중의 죄인이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리에게 오셔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나의 제자가 되라’는 뜻이요, 제자가 되라는 말은 ‘내가 너를 받아들이고 용납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마태는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베풀었고 이 잔치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식탁공동체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지 않습니다. 자기와 신앙이 같지 않은 사람들, 죄인들, 하나님 앞에 정결하지 못한 사람들과는 절대 식사를 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삼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이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식탁에 대한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세리를 용납할 수 있느냐’ ‘어떻게 그런 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느냐’ ‘어떻게 죄인들과 같이 있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항의는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런 정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의 한편에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저런 세리와 같지 않으며 나는 저런 죄인이 아니다’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누가복음 18장 9~14절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기도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를 보십시오. 이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5~6절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에 속한 자의 판단 기준은 육신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저 사람보다 내가 좀 더 낫기에 나는 선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항상 변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과 가치관이 날마다 요동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좀 더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좀 더 높이 올라가면, 다른 사람보다 내가 좀 더 예쁘면, 다른 사람보다 내가 좀 더 인정받으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행복뿐만 아니라 불행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뭔가 부족하거나 가진 것이 적을 때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육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31~3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 마태를 보고 상종치 못할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기에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인 마태를 보는 순간 그 마음 가운데 한없이 불쌍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내면은 상처로 가득 차 있었고,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가지면 가질수록 감당할 수 없는 빈 공간이 있었습니다. 마음의 상처, 고통, 외로움, 목적 없는 인생의 방황가운데 서있는 불쌍한 사람이 예수님의 눈에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셨고 그와 함께 식탁을 했고 ‘나를 따르라’고 초대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의 가진 것을 가지고 그를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자체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가진 것, 그의 직책, 그의 직업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영혼과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가졌는지를 보시지 않고 우리 내면 깊은 골짜기에 숨어있는 것을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그분만이 우리를 위로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분만이 ‘함께 일어나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영에 속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영의 속한 사람은 육의 속한 가치관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소유보다는 존재 자체를 보며 그분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분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 가’보다 ‘어디에 서 있는가’에 대해 묻는 분이십니다.
격려와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
주님을 만난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 사람이 변화된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죄를 지적하면 절망이 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소망이 아니라 절망을 가르쳐줍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적함으로 변화와 부흥을 소망하지만 실상은 죄책감과 절망이 올 뿐입니다. 참된 변화는 지적보다는 격려에서, 정죄보다는 사랑에서 옵니다.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의미다’라고 붙들었던 모든 것을 주 예수를 만나는 순간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듯이 버리고 좇은 것입니다. 로마서 8장 7~9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사고방식은 끊임없이 육신을 향해서 달려가지만 사실 원래 우리 자리는 그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원래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정죄하는 자리가 아니라 격려하는 자리입니다. 보이는 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기면서 기도하는 자리가 원래 우리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의 습관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습관을 따라 예전의 편안한 자리로 갑니다. 그러면 사탄은 그것이 원래 우리 자리라고 자꾸만 말합니다. 우리는 좀 불편해도 우리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 자리는 정죄하고 잘못을 비판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하고 격려하고 함께 아파하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힘써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거듭난 자
예수를 영접해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음에도 육의 생각을 따라가는 삶을 여전히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를 영접했음에도 영접하기 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멋있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처럼 행동했고 시기하고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당을 지었고 그로인해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분열된 모습을 보면서 영적이지도 않고 그리스도적이지도 않으며 육적인 모습이며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이 내용을 오늘 누가복음 5장 36~39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여전히 과거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갖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것이요 새 옷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이지도 않고 육적이지도 않습니다. 둘 다 얻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잃게 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삶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새로운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고, 새 옷은 새 옷 그 자체로 아름답게 입고 살아야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 사람으로, 영적인 삶으로, 부름 받은 사람으로 육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서 계속 살아간다면 큰 어려움에 처할 것입니다.
둘 다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은혜가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로 부름받은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영적 전쟁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렇게 애쓰는 사람이 건강한 성도며 교회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기 시작하면 그 가운데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기도가 우리 입에서 터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것을 많이 주었는데 더 주어야 한다고 하고, 많은 것을 가졌는데 버리겠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기도가 우리 가운데 터지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건강한 성도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온누리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가치관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가 했던 영적전쟁을 오늘날 우리도 해야 합니다. 승리하십시오. 날마다 기도 가운데 삶 가운데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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