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베드로를 격려하시는 예수님

새벽지기1 2017. 11. 29. 13:31


사람을 살리는 방법에 비판이나 충고보다 칭찬과 격려가 훨씬 효과적입니다.

건강한 비판이나 사랑의 충고도 사람을 변화시키지만, 그보다 진정한 칭찬과 격려가 사람을 더욱 변화시킵니다. 사람이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길 원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세상살이에서도 칭찬을 받길 바랍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결여돼 있는 경우에 누군가 다가 와서 작은 격려라도 해준다면 그 사람은 살아나게 됩니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보이게 됩니다. 


자기 분열로 실의에 빠진 베드로   


세상에는 잘못된 칭찬도 있고 위선적인 격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살기 위해 칭찬과 격려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장점을 칭찬하며 격려하는 사이가 돼야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가정을 살리고 직장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거로 돌아가려는 제자들을 여전히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기모순에 빠져 힘들어하고 있을 때 찾아가셔서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옛 직업으로 돌아가 그물을 들고 바다로 나가서 새벽이 되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제자들에게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들을 잡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곧 칭찬과 격려는 사람을 살리고 용기를 주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부록과 같은 21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격려를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자기 갈등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시고 격려하시며 비전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서의 마지막 장을 충만한 은혜로 장식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추운 새벽에 숯불을 피워 놓고 생선과 떡을 구워 제자들을 불러 함께 조반을 나누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얼굴빛은 그리 밝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자기 갈등과 모순에 빠져 있는 베드로가 특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선을 집중하십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초점이 한 사람에게 모아지면서 크게 클로즈업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15절 말씀을 봅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베드로는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좋아했고 예수님께 헌신하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적인 갈등과 좌절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현주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을 의심하고 회의에 빠져 배신까지 하게 됩니다. 


어부로 돌아간 제자 위로하신 예수님   


그런 현상이 유독 베드로에게 심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장담했습니다.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당시에 베드로는 쉽게 흥분하고 열정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일은 절대로 예수님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또 마태복음 26장 33절에서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큰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확실히 배신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을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입니다.


성경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은 약속하고 결단을 보이지만, 실제로 그대로 살려고 하면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평소에 예수님께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인간적인 말을 하게 되고 실수를 연발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본인인들 얼마나 힘들고 괴로워했겠습니까? 자신이 말한 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큰소리를 쳐 놓고 가야바 법정의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왜 주님을 모른다고 말을 했을까 하면서 자책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베드로의 행적을 여러 모로 추측해 보면 그는 일종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하고 싶은데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나는 왜 이럴까’하는 유형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게 인생입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 뺨을 때리게 되는 게 부부 사이입니다. 그러면 어제 사랑한다는 말과 오늘 손이 올라가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면서 자기 분열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런 현상은 가정, 사회, 신앙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자기 갈등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물을 집어 들고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얼굴은 웃음 대신에 근심이 가득했을 것이고 생기 대신에 무기력증이 넘쳐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먹으면서도 베드로의 마음 한구석에 우울함으로 짓눌려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베드로가 사도 요한의 말을 듣고 해변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급히 바다로 뛰어내려 다가갔지만, 막상 예수님 앞에 도착하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21장 말씀에서 베드로가 뭔가에 막혀 답답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 vs. 필레오 사랑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하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공식적인 이름이 아닌 개인적이고 친밀한 이름을 택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다른 말을 하게 되면 그의 울분이 터져 버릴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에게 접촉하시는 방법을 달리 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싸움을 했다고 치십시다. 미워서 싸운 게 아니라 사랑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싸운 것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도 나를 사랑해?’하면서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한 적이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봐 주시기도 하는 겁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숨통을 트이게 되고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좋은 말 한마디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지금 괜찮니? 그때 너의 마음은 안 그랬을 거야. 너는 실수했지만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라고 하시면서 다가오십니다.


뜻하지 않은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께 야단을 맞을 줄 알았는데, 잘못을 지적당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말씀은 없으시고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의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주여, 내가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버려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면서 객기를 부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는 기가 많이 꺾여 있습니다. 의기양양했던 베드로의 코가 납작해져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제 입으로 말하겠습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라고 겸손해 합니다.


사람은 같은 말이라도 오만하게 할 수 있고 의기양양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겸손해지고 같은 말이라도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실수를 인정하면서 입 밖으로 내게 됩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한 풀 꺾인 것입니다. 그리도 펄펄 날뛰던 예전의 베드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언어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어 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필레오)밖에 할 수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겸손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께로부터 엄청난 말씀을 끌어오게 하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미션(mission)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명대유임선언문’(使命大留任宣言文)입니다.  


‘경외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나님의 위대한 미션은 겸손한 사랑의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주님, 이 정도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전공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고백한다면 절대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잘하는 것이고 내게 익숙한 것이며 내가 눈감고도 할 수 있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교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겸손하게 사랑을 고백할 때, 주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미션을 주시는 겁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첫 번째 말씀을 하신 후에 똑같이 두 번째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도 똑같이 대답을 합니다. 그는 더 이상 큰소리 칠 게 없다는 뜻입니다. 17절 말씀을 읽습니다.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두 번째 말씀을 하신 후에 세 번째로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거듭 똑같은 말로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매우 근심이 되어 바짝 긴장합니다. 곧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만약 부부 사이에 언쟁을 벌였다면, 한동안 진정한 다음에 ‘여보, 나를 사랑해?’라고 물어보세요. 또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한 참 후에 또 한 번 물어보세요.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한 번 ‘여보, 나를 사랑해?’라고 물어보세요. 그러면 상대방은 매우 긴장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믿음 상태란 공포가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곧 두렵고 떨리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잘못된 것이 인간의 방자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영적 상태인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의 경외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진정한 사랑의 고백에 겸손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고백에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하는 영적 태도가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예배의 태도입니다. 둘째로 실수한 만큼 회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못 알아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배신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회복의 기회를 세 번 주신 것입니다. 만약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을 회복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회를 줘야 합니다. 아무 의미도 없이 막연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앙금을 모두 털어버릴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합니다.  베드로는 추위 때문에 숯불을 피워 놓은 가야바 법정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고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어쨌든 베드로와 숯불은 관계가 있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배려가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 자신감을 잃은 사람, 본인에게 스스로 실망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용기를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진정한 사랑의 겸손한 고백이 있고 진정한 회복의 충분한 기회가 있으며 진정한 사명에 대한 위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의 능력이 얼마나 되냐? 네가 얼마나 완벽하냐?’라고 질문하시지 않습니다. 또 ‘네가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느냐?’, ‘네가 얼마나 많이 배신을 했느냐?’고 책망하시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어보실 뿐입니다. ‘미션’의 비전을 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비전을 주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비전도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인권을 무시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 짐승처럼 대우 받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을 돌보고 양육하라는 비전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몇 가지 말씀을 더하십니다. 먼저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예언입니다. 18, 19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최후에 관해 말씀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젊어서 마음대로 다녔지만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이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20~22절 말씀을 읽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그 당시에 사도 요한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사실을 여쭤 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가 일찍 죽든, 늦게 죽든 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너의 동반자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기업이나 직장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네가 하고 싶다고 모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네가 젊어서 마음대로 다녔지만 나이가 들면 할 수 없게 된다. 네게 중요한 것은 나를 따르는 일이다’라고 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는 겁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성도님들께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저희는 성만찬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저희를 위해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이 시간에 먹고 마시며 만남을 갖게 됨으로써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업그레이드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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