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성

새벽지기1 2017. 12. 3. 06:24


이사야서를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나 자신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기껏해야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정도입니다. 하나님에게 관심이 적으니 묵상도 적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 가장 위대한 사상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손으로 바다 물을 퍼낼 수 있나


지난주에 보았듯이 이사야는 하나님을 강한 용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적도, 원수도 무찌를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양떼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목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하나님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위대한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표현했습니다. 40장 12절입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첫째, 어떤 인간이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와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을 펴 보십시오. 이 손으로 어떻게 바다 물을 다 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손으로 하나님을 재보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크신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누가 뼘으로 하늘을 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수많은 별들이 떠 있는 하늘을 뺨으로 어떻게 재겠느냐는 것입니다.

셋째, 누가 되에 땅의 흙을 다 담아 보겠느냐 입니다.

넷째, 저울로 산들을 달아보겠느냐는 것입니다. 큰 저울, 작은 저울로 산을 달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 관점은 이렇게 어리석고 제한적입니다. 눈을 감고 세상을 보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위대하시고 상상할 수 없이 크신 분인데, 우리는 신이 되려고 하고,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천박하고 어리석은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가르치겠는가

둘째, 이사야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했습니다. 13,14절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인간은 마치 하나님을 지도하는 것처럼, 마치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마치 인간이 하나님보다 지식이 많은 것처럼 말을 하고 정치를 하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위대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쥐꼬리만 한 자기 지식과 경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얻어맞아야 새벽기도회에 오고, 조금만 잘 되어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것 같이 교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잘 해주실 때 우리도 잘 하면 좋은데, 하나님께서 조금만 잘 해주시면 자기 잘났다고 교만해집니다. 하나님께 대들면서 마치 하나님을 자신이 인도하는 듯 한 표정을 짓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상담자가 되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 상대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께 교훈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어쭙잖은 정의로 하나님을 난도질합니다. 자신의 정의가 하나님의 정의보다 옳은 것처럼 말을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공평의 도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지식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통달의 도를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식과 지혜를 주셨는데, 인간은 그 지식과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이사야는 이런 인간의 오만함과 천박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온을 조금만 바꾸셔도 꼼짝하지 못합니다. 태풍이 한번만 불어도 우리는 물에 잠깁니다. 저는 노아의 홍수가 실제로 있었다고 믿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지하수가 터져서 이 세계가 물로 덮이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마지막에는 불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크신 하나님을 우리는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열방은 한 방울 물과 같다


셋째 이사야는 하나님을 인간의 권력과 부와 영광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려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앗수르, 애굽, 바벨론 등 거대한 제국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들은 위대한 왕의 권력과 군사력으로 세상을 정복할 것 같았고,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15~17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성령을 받으면 영적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영원하심, 전지전능하심이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성령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 지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하나님은 나보다 작은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사상보다 작고, 경험보다 작고, 이성보다 작은 하나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령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5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당시 거대한 제국이었던 앗수르, 애굽, 바벨론은 ‘한 방울 물 같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물을 담을 때 물 몇 방울이 흐르지 않습니까. 그 거대한 제국이 잘 보이지도 않는, 아무 것도 아닌 물 한 방울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저울에 있는 작은 티끌과 같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사막이 되고 폐허가 되었지만 당시 레바론에는 가장 울창한 숲이 있었습니다. 그 숲에 있는 동물들을 다 모아도, 나무를 다 모아도 번제에 쓰는데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너무 무식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너무 단순합니다.

여러분,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기도를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수준의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도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내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을 뜨십시오.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우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세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18~20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첫째, 하나님은 우상과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만든 신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우상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인간은 우상을 만듭니다. 나무, 돌, 금붙이 등 형상을 만들어서 절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만든 것이 하나님이 될 수 있을까요? 내 손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은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 금이나 은을 부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도 조심해야 합니다. 상징적인 것은 괜찮지만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가 아무리 좋아도 형태로 만들기 시작하면 큰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가난한 사람은 금이나 은을 살 수 없어서 나무로 만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기독교를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을 우상화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예배는 형식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형식은 있는데 예수가 없습니다. 제가 로마에 가서 충격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바티칸도 있고, 박물관도 있고, 유적들도 많은데 예수가 느껴지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가 없고 종교라는 껍질만 남았습니다.

십계명 중에 제2계명을 기억하십시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늘의 별을 지으신 하나님


21절부터 24절까지 함께 보겠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

둘째, 하나님은 세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을 마치 하늘과 같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짐승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황제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권력자, 정치가와 하나님을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귀인들을 폐하시고, 세상의 군주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25~26절입니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셋째,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누구와도 하나님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 별들도, 세상의 모든 것들도 이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죽을 것같이 힘들고 계획이 다 망가졌을 때 눈을 감고 하늘의 별을 생각하십시오. 이 별 하나하나를 만드신 하나님. 이 별을 두기 위해 창공을 만드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시고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축복이 오기 시작합니다.

 

참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결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권력자 같은 하나님, 이상적인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눈을 떠서 참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만드시고,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신음소리까지 들으시는 하나님을 눈을 떠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묵상하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묵상은 잘 되지 않습니다. 묵상하려고 하면 더 안 됩니다. 느껴지지도 않고 졸리기만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마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생기면 말이 많아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기 시작하면 눈물이 나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맥박이 뛰고 흥분이 됩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을 여러분이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꽃을 보면서 그 꽃을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한 예술성을 보십시오. 우주의 음악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구원의 웅장한 드라마가 여러분의 심령에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엄청난 구원의 오케스트라가 여러분의 귓전에 울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 있다가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감동합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광야에 대로를 만들어라. 여호와의 길을 만들어라. 하나님이 오신다!”

우리의 마음은 사막입니다. 그 사막과 같은 마음에 하나님이 오십니다. 할렐루야!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찬송가를 1장부터 끝까지 다시 부르십시오. 성경도 막 읽지 마십시오. 곳곳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흔적, 호흡을 체험하십시오.

하늘의 별을 보듯이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우상과 형상보다 크신 분이요, 그분은 세상의 모든 정치와 군사 권력보다 크신 분이요, 이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티끌과도 같은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분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아시는 분이요, 내 숨소리, 신음소리를 듣는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양떼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병든 양은 품에 안고 다니는 분입니다. 갓 새끼를 낳은 양을 특별 관리하시는 분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우상이 아닌 하나님 세상의 권력자와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살아도 주인이요, 여러분이 세상을 떠날 때도 그분이 주인입니다. 성공할 때도 실패할 때도 그분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능하신 그분을 입을 열어 찬송하십시오. 하나님을 느끼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는 악기 연주를 하는 사람이 찬양을 드리면서 감동을 받아서 손을 들고 있는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성가대가 좋은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목이 메서 찬송을 부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름다운 찬송이라 생각합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혹시 마음에 고통이 있습니까? 상처가 있습니까? 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았습니까? 가정에 위기가 있습니까? 저는 오늘 이 말씀으로 여러분을 권면하고 싶습니다. 고통과 아픔을 묵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기도합시다

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오늘 내 세포가 하나님을 노래하게 하시고

막힌 혈관이 뚫리게 하시고

죽었던 모든 것이 살아나게 하옵소서.

내 믿음이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주님은 영원하십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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