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어거스틴

제10 권 고백 (149) 16. 망각의 기억.

새벽지기1 2017. 9. 8. 06:53


10 권 고백





16. 망각의 기억.

 

그러면 내가 망각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그 입에 담은 말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 말하는 것은 그 말의 음향이 아니라

그 말이 의미하는 사상(事象)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음향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잊었다면

그것은 결코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기억을 기억하는 경우, 기억 자체는 그 자신을 통해서 현존합니다.

즉 기억을 통해서 내가 기억하고 망각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각이란 바로 기억의 결핍입니다.

그러면 망각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것은 어떤 식으로 기억에 현존하는 것일까요?

만약 망각이 기억에 현존한다면 기억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을 기억할 뿐 망각은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 망각이라는 말만 듣고 그 말에 의해서 그 뜻을 인식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결국 망각은 기억에 현존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릴 것이며

망각이 기억에 현존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잊어 버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망각을 기억하는 경우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

망각 자체가 아니라 그 영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까요?

망각 자체가 현존한다면 기억은 커녕

오히려 망각을 위해서 존재하는 셈이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 문제를 규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시여, 저는 이 문제를 위해 노력하고 나 자신을 위해 애썼습니다.

나 스스로가 곤란과 땀을 필요로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천계를 재는 것도 아니고 땅의 중량을 재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오직 나, 다시 말해 기억하는 나의 영혼이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아닌 것이 나 자신의 자아에서 멀리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 보다 내게 가까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나 자신의 기억은 내가 파악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선명하게 나의 망각을 기억한다면

나는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내가 상기하는 기억 속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망각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그 망각을

내 기억 속에서 인지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어리석은 일뿐입니다.

 

그러면 제3의 해결은 어떻습니까?

내가 망각을 기억하고 있을 때 나는 망각의 영상을 기억에 보관하는 것이지

망각 그 자체를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것이건 그 영상이 기억에 새겨지기 위해선 우선 그 자체가 현존해야 합니다.

 

내가 카르타고를 기억하고 그전에 살았던 모든 장소를 기억하고

그전에 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다른 여러 감각이 전하는 것을 기억하고

또 육체의 건강이나 아픔을 기억하는 것도 모두 그러한 방법에 의한 것입니다.

즉 이러한 것들이 현존할 때 기억은 그것들로부터 영상을 받아들엿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현존하지 않아도 상기하는 경우에는

마치 현존하듯이 마음으로 보고 상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망각이그 자체에 의하지 않고 영상에 의해서 기억된다면

그 영상이 파악되기 위해 우선 망각 자체가 현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망각이 현존했을 때에 그것은 어떻게 해서

자기의 심상을 기억 속에 새겨 놓을 수가 있었을까요?

망각은 현존함으로써 이미 거기에 새겨져 있었던 것까지도 말소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사 어떤 방법에 의하던지 비록 불가해하기 때문에

설명하기 곤란한 방법일지라도 망각 그 자체까지도

-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메워져 버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