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이고, 또 하나는 ‘부활’입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을 통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의 역사를 이루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천지 창조의 핵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증상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창조론은 인간의 이성으로 잡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은 인간 인성의 산물로 설명하지 않아도 아무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믿음의 산물이며, 인간이 믿음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만유와 인간을 창조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부활이란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으므로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영원한 삶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어느 날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죽게 되면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통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서도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창조의 핵심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듯이, 부활의 핵심에도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터치’에서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 고난을 피하지 않고 고난으로 고난을 극복해 내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곧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부활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터치’입니다.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물질은 죽어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된 게 인간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늙고 병들어 죽으면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시신을 하관해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전에 육체를 위해 화장하고 좋은 옷 입으며 열심히 껍데기를 연마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꾸고 꾸며도 육신은 죽고 맙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핵심은 하나님의 생명
부활의 핵심에 생명 터치가 있습니다. 에스겔서 37장 말씀 전부를 보면, 생명이 가는 곳에 마른 뼈들도 군대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우주는 생명체입니다. 창조와 부활의 핵심에 생명이 있기에 창조와 부활은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며 소경을 눈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토론을 거듭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적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진리 하나만 인정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기적들은 아무 문제없이 저절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정도 기적들을 능히 일으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창조를 믿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부활을 믿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죽음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도 나도 모두 항상 죽음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십자가를 보게 되면 자연히 예수님의 죽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선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나 이해하는 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경험에는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무덤에 갇혔습니다. 예수님 안에 살리시는 이의 영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살리시는 영이 있으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매장을 해도, 화장을 해도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한 줌의 재로 변한다 하더라도, 능히 하나님께서 영의 몸으로 부활시키십니다.
이번에 저의 장모님 장례식에서 이재훈 목사님이 설교 중에 ‘죽음도 선물’이라며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에게 죽음은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육신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죽음이 오지 않으면 육신의 옷을 벗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 죽음, 사탄에 대한 완전한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축복이란 창조된 꽃 한 송이, 바람, 나무, 별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할 것을 믿기에 어떤 슬픔과 위기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실체를 보여주신 예수님
고린도전서 15장 3~6절에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와 ‘다시 살아나사’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부활의 실체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열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도마는 현장에 없었고, 가룟 유다는 자살해 죽었음). 보지 못해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또 디베랴 호숫가에서 여섯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갈릴리에서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 부활의 실체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120명의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다메섹 근처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이 유배지 밧모섬에서 해같이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밧모섬에서 기도하던 중에 천국으로 이끌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습니다.
한두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다면 착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 프랑스의 나폴레옹, 위싱턴 대통령, 이순신 장군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꼬마가 손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자 아직도 살아계신다고 응답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도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육의 몸과 영의 몸을 동시에 가진 부활체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의 몸과 영의 몸을 동시에 가지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었는데도 예수님께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생전에 예수님은 육의 몸만 가지셨기에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의 몸과 영의 몸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한 후에 천국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시면서 육의 몸과 영의 몸의 실체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첫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많은 설교를 하셨지만, 부활하신 후에 모든 설교를 완성하셨습니다. 부활 후 첫 설교에서 메시지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곧 샬롬으로 완성된 축복이요, 승리입니다. 저는 설교하러 나올 때 하나님께 ‘할렐루야’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겐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도의 집을 심방하게 되면 가장 먼저 축복해야 합니다.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이 있기를 바란다고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 땅에도 주님의 샬롬이 있기를 축복해야 합니다.
20절 말씀을 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신 사실입니다. 이는 영이 아니라 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육의 몸만 가지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체로 변화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육의 몸과 영의 몸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을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부활 자체를 거부합니다. 인간 안에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어서 죽음과는 친근합니다. 따라서 고대 사람들은 스핑크스나 피라미드를 만들어 죽음을 하나의 구원으로 노래했습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인간
인간의 경험 세계에 부활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고 터치가 있어야 죽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죽음입니다. 곧 죽음은 슬프고 비참하며 저주이고 끝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부활 터치가 있는 사람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며 담대하게 죽음에 맞섭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억지 주장을 퍼뜨렸는데 그 중에 하나가 ‘도적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감춰 놓고 부활한 것으로 거짓 선전했다는 것입니다. ‘기절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한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온 후에 깨어났다는 것입니다. ‘무덤 오인설’은 시신을 무덤에 두었는데, 여인들이 너무나 예수님을 사랑한 나머지 다른 무덤을 예수님의 무덤으로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환상설’은 예수님을 지나치게 사모한 여인들의 환상을 실체로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많은 설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진실 앞에 그런 주장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 앞에 오류는 무력해질 뿐입니다. 21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의 예수님께서 다시 평강이 있으라고 설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내다’는 동사가 진행형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을 맛보고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죄 많은 세상으로 파송돼 하나님의 평강을 전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기독교 진리에 두 가지 동사가 주를 이룹니다. ‘오다’(come)와 ‘가다’(go)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오라. 병든 사람도 오라.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도 오라’는 것입니다. 와서 은혜를 받은 후 세상으로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병들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위로하며 부흥이 없는 곳에 부흥을 위해 힘쓰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22, 23절 말씀입니다.“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 설교에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 받는 것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말씀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음식을 보면 구경하지 않고 먹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보고 독약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 영양가는 얼마나 될까 하면서 따지기만 한다면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머니가 지으신 따뜻한 밥을 믿고 그냥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명령을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딴 생각하며 자꾸 따져듭니다.
성령을 받고 주님의 평강을 전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성령님이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타인들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상처를 주면 거절하면 됩니다.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받지 말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 설교에서 용서의 위력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너무 미워 전도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생에서 그 사람이 너무 지겨웠는데, 천국에 가서 또 만날 것을 생각하니 너무 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지금 순간에 마음에서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사하여지고, 용서하지 않으면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능력은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면 우리 신체에 엔돌핀이 나오고 면역 기능이 높아집니다. 그 마음에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가 타인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시기하고 싸운다면 신체에 나쁜 호르몬이 작용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고 서로 갈등하고 분노하는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온누리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가득 전해야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너희를 파송하노라,너희는 성령을 받을지어다’라고하신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 위에성령의 부으심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영이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좋은 말씀 > 하용조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라 (0) | 2017.09.11 |
---|---|
비전터치 (0) | 2017.09.09 |
기도터치 (0) | 2017.09.07 |
침묵터치 (0) | 2017.09.05 |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0) | 2017.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