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비전터치

새벽지기1 2017. 9. 9. 07:22


예수님의 일곱 개 터치 중에서 마지막으로 비전 터치에 대해 나눠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정점은 부활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로 끝난 게 아니라, 제자들에게 비전을 갖도록 애쓰셨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비전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으로 끝난다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스캔들이고 그분의 죽음은 저주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아로서 합당한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 터치입니다.



부활은 비전을 잉태하다

예수님의 부활 터치로 죽음은 생명으로, 상징적 구원은 확실한 실제로, 순간은 영원으로 바뀐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며 기독교 신앙은 장례 문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죽음의 그림자를 나타내고 있으며 피라미드, 스핑크스 등 각종 무덤들이 발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터치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시며 공생애 3년 동안 사역하신 것만큼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을 행하셨다면, 기독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하신 일은 제자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목사가 하는 최고의 일은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고, 순장이 하는 최고의 일은 순원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겁을 먹은 채 두려워하여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만나 안심시키고 함께 식사하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다시 어부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가 만나주시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십자가 사건을 지켜보고 부활마저 목격했지만, 옛날로 돌아가 어부가 베드로도 찾아가셨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셨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목소리를 들어보니 어디서 많이 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도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 그렇게 하셨던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베드로가 고개를 들어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비전을 심어주시다


베드로는 옳다고 생각하면 그냥 물속에라도 뛰어드는 사람이지만, 과거의 상처 때문에 감히 예수님께 접근을 못합니다. 베드로는 ‘주님’하고 부르면서 뛰어가다가 멈춰 섰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배에서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준비하셨는지 해변에 맛있는 생선을 구워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야, 네가 그럴 수 있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꺼내실까 봐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프니 생선을 먹으라며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선 베드로를 보시고, 베드로는 땅만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 후 예수님께서 기가 막힌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라면서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 물어보신 이유는 베드로가 세 번 배신했기 때문에 세 번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 물으시자 나중에 베드로는 겁에 질려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양을 먹이고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베드로에게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 비전을 잉태하려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비전이 잉태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상처받은 제자들을 치유하시면서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잉태된 비전은 성장하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지상에 계시는 동안 세 가지 특징을 보여 주십니다. 첫째는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 천국에서 살아갈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영의 몸과 육의 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부활의 몸으로 지내게 됩니다.

둘째는 실망한 제자들이 믿음을 회복하는 동안 계속 찾아가시고 용기를 부어 주신 것입니다. 된 듯하다가도 다시 보면 제자리걸음인 게 인간입니다. 교회에서 ‘아멘, 할렐루야’하면서 큰 소리 쳐도 밖으로 나가면 작은 어려움에도 곤두박질칩니다. 쉽게 잊어버리고 배신하며 의심하고 열등감에 빠져 자학하는 게 인간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끝까지 비전을 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심하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전을 갖게 되면 그런 것은 곧 사라집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이리저리 오고가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우리 속에 비전을 태동하게 되면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전을 갖고 믿음이 자라지 못하면 임산부가 유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속에 잉태된 비전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라게 마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보이신 활동에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 제자들에게 비전을 잉태시키실 때 개인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여러 여인들과 베드로와 열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만나주셨습니다. 

각 사람은 개인적으로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나의 양을 먹이고 치라’며 비전을 주셨습니다. 또 도마에게 ‘네가 나를 보고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나 단체는 공동체적으로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동체의 개개인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너희를 파송하노라’, ‘성령을 받으라’라고 비전을 주셨습니다.



공동체에 집단으로 비전을 주시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에 집단적으로 비전을 주십니다. 그것이 본문에 있는 말씀입니다. 16, 17절 말씀을 읽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열두 제자들이 아니라 열한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빠졌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가룟 유다에게 기회를 주셨지만 그는 스스로 기회를 물리치고 빠져 나간 것입니다.

둘은 예수님께서 배신의 쓴잔을 드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공동체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도 흠이 있고, 실수가 있었습니다. 보편적으로 대하기 힘든 사람들이 완벽주의자입니다. 그들은 항상 실수가 없어야 하고 모든 일에 최고가 되어야 하므로 모든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스스로 완벽주의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셋은 열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명하신 산에 모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경배하지만 개 중에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저는 개인적으로 속이 후련해집니다. 세상에 예수님을 믿고 경배하는 사람만 있다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믿음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믿음 중에 의심하고, 의심 중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전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게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이 있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수가 많았고 부족했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를 포기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25년 동안 아브라함을 이끄시며 이삭을 낳게 하시고, 1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끔 온전한 믿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 비교적 충성스런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와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가룟 유다처럼 배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도마처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초대 교회를 세우시고 로마 교회를 만드셔서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18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전을 잉태시켜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의 문제입니다. 하용조라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말을 예수님께서 하시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자들에게 비전을 주시며 말씀하시는 분이 다름 아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의 권세란 곧 하나님의 권세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능력이 곧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은 우주를 포함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천국의 권세까지 위임 받으신 예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땅의 권세는 창조의 권세를 말하며 곧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구체적으로 권세를 행하신 것이 바로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또 내면의 권세를 행하셨는데 바로 사랑, 용서, 섬김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의 공동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전을 잉태시키십니다. 19,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잉태시키신 비전의 실체를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가서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첫째는 ‘가라’(go)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한마디로 ‘가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로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가족들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안전하게 노후 생활을 준비해 두면 괜찮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이것이 위기를 몰고 올 수도 있습니다. 노후 생활을 위해 내 집 마련과 각종 보험에 든 사람은 오히려 위기를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험, 도전, 창의력을 잃어버린 채 마냥 죽음을 향해 늙어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로 인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기득권을 포기하고 본토, 친척, 본향을 떠났습니다.  


기독교는 이민의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으로 이민 오셨고 선교사의 신앙이 다른 나라로 떠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외국인에 대해 많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제 시대 때 압박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나라도 외국인들에게 많은 박대를 하고 있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에겐 친절히 대하면서, 가난한 동남아 노동자에겐 너무나 박대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산업 재해와 밀린 임금 등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이고 이민자입니다. 성경은 나그네를 돌보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에게 도망 다니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실 안주는 스스로 무덤을 파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비전 터치’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현실 안주는 곧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모든 족속이란 인종, 성별, 노약자 등 구분 없이 모든 인간을 망라합니다. 성경에 국가의 개념은 없습니다. 그러나 족속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국가에 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부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셋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전도한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해야 합니다.

작고하신 김사무엘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분이 북한에 가셨을 때 고려호텔에서 20대 젊은이 두 명에게 세례를 주셨답니다. 성경, 찬송, 교회, 목사, 장로도 없는 북한에서 태어나 어떻게 믿음으로 자라날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들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자식을 믿음으로 키운 후 세례를 주고 싶었는데, 마침 김사무엘 목사님을 만나게 되면서 세례를 받게 했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환경에서도 자라나는 것입니다.

넷째는 예수님께서 부분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의 주제는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칠 자신이 없으면 배우고, 자존심이 상해 배울 수 없다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대일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배운 것을 지키게 하는 것이 비전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비전을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교리이고 지키는 것은 삶입니다. 교리와 삶이 일치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세계로 나가서 모든 부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비전 터치입니다. 이 아침에 비전의 잉태가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비전 터치를 나누었습니다.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비전을 심어 주셨던 것처럼,

오늘 말씀을 들은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비전을 잉태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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