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서기 위해선 삶의 모습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충성된 군사, 규칙대로 경기하는 경주자,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농부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비유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함으로써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켜나가야 함을 배웠습니다.이제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정받는 일꾼, 귀하게 사용되는 그릇이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과 소유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의 달음질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알아봅니다.
14절 말씀입니다.“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곧이어 16~18절 말씀도 읽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말다툼을 피하라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피해야 할 것으로 말다툼입니다. 여기서 말다툼이란 하나님의 진리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심과 만족을 채우기 위한 논쟁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무 유익도 없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망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 불의한 말, 음란한 말들을 피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열, 반목, 질시만 일으킬 뿐입니다.또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영혼을 죽이는 독약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말들은 인간의 영혼을 썩게 하는 암세포와 같은 것입니다. 건강한 세포를 죽이는 암세포는 도려내야 하듯,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순결함을 가로막는 모든 망령된 말들을 우리 스스로 제거해야 합니다. 특히 본문 말씀에서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사람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에베소교회 안에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것 같습니다. 특히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부활은 지나갔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고 영혼만 구원 받은 것으로 믿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헬라의 이원론 사상이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은 선하고, 땅에 있는 것은 악하다’는 식으로 사고했습니다. 또 영지주의자의 득세로 육신은 죄 중에 있어도 괜찮고 영혼만이 거룩하고 완전하며 심지어 육신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며 자학하거나 자살을 권장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명히 육체를 입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6~22절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고 분명히 먹을 것을 달라하시며 생선과 떡을 잡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몸에 난 못자국과 창에 찔린 자국을 보여 주셨음은 분명히 육신의 부활을 증거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현재 우리의 몸과 같은 것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몸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는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 몸을 입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육체의 부활이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미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9~20절 말씀을 통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으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후메내오는 디모데전·후서 한 번씩 나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뜻하는 ‘가장 사랑받는 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리에 서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왜곡한 암적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를 거부하는 것은 진리에서 떠나 믿음을 흔드는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말다툼과 망령되고 헛된 말들을 버려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절대로 버려야 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둘째,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분변하다’는 말은 ‘똑바로 자르다’는 뜻입니다. 마치 석공이 대리석을 바르게 자르듯, 농부가 쟁기로 밭을 곧게 갈 듯, 경주자가 운동장을 규칙대로 달리듯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가지 말고 올바르게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삶에 제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려라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논에 물대기’라는 뜻으로 자기에게 이롭게 되도록 멋대로 언행을 일삼는 것을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뜻에 맞도록 오도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도록 나의 뜻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제가 중국에서 사역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어떤 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족자 하나를 주셨습니다. 신명기 28장 6절 말씀인데 한자로 적혀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성경책을 보고서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임을 알고 너무 좋아서 그 족자를 현관에 걸었습니다. 어느 날 세미나에서 이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목사님, 19절 말씀도 읽어 보셨나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9절 말씀을 살펴봤더니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명기 28장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복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씀에 관해 모르셔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혹시 우리는 말씀에 대해 편식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듣기 좋은 말씀과 먹기 좋은 말씀만 암송하고 붙잡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내비춰 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 입니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차금지 구역에 잠시 차를 세우고 재빨리 식당에 들어가 속히 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불법 주차 스티커가 붙어있을 경우입니다. 우리는 편의와 관용을 생각하지만, 교통 경찰은 원칙과 공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6절에서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도록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딤후 4:6)라고 고백했습니다. ‘관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포도주를 붓는 제사입니다. 포도주는 제물의 악취를 제거할 뿐 아니라 완전 연소를 돕는 작용을 합니다. 바울처럼 우리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많은 후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를 기억하면서도 그를 가르쳤던 디 지오반니를 기억하지 않고 있습니다. 디 지오반니는 훌륭한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14세의 미켈란젤로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한편 재능이 많은 사람은 얕은 재주로 힘든 훈련 과정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디 지오반니는 미켈란젤로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작품을 망치로 깨뜨린 후 훈계했습니다. “재능은 값싼 것이다. 정말 값진 것은 노력과 헌신이다.” 그 후 미켈란젤로는 훌륭한 조각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우리는 삶에서 고된 훈련을 감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기 위해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세상 풍조나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최고의 삶을 드리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합니다. 19~21절 말씀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셋째, 하나님께서 스스로 깨끗이 하는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주인이 그릇을 사용할 때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습니다. 재질이나 용도에 관계없이 그릇 사용함에서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릇에 대한 깨끗함의 여부입니다. 로마서 9장 21절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질그릇이든 나무그릇이든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고 천히 쓰시는 것을 결정하십니다. 내가 남자든 여자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그릇이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깨끗하게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 깨끗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19절입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교회)에 인을 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16장 5절에서 26절까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레위의 고라, 르우벤의 다단과 아비람, 벨렛의 온이 반역하여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3)라며 항의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피가 나고 악취가 심해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레위기 말씀에 의하면, 그녀의 병원(病原)은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12년 동안 치유를 위해 별 짓을 다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에게 치료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으로 감히 나아갈 수 없어, 몰래 뒤로 돌아가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곧 그녀는 혈루의 근원이 마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만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인은 몰래 주님의 능력을 빼앗아 치료받은 사실이 발각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모든 사연을 아뢰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며 축복하셨습니다.
죄악의 모양까지도 제거해야
우리는 스스로 죄악을 제거하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우리의 마음과 모든 형편을 아시고 주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친구와 싸운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들어오시자, 그 친구는 제가 먼저 때렸다고 고자질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두 사람 모두 잘못했다며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습니다. 저는 억울했습니다. 친구가 먼저 때렸고 저는 일방적으로 맞기만 했는데 뭐가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얼마나 억울했던지 지금까지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 고난, 압박 등이 닥쳐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부르신 자들을 아시고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19절 말씀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에서 떠나자, 땅이 갈라지면서 반역의 무리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잠언 25장 4절에서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악의 습관까지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쓰임을 받는 용도는 다양하지만,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깨끗함입니다. 우리가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될 때 하나님께 귀하게 사용 받고 용도에도 합당하게 되며 선한 일에 예비함도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 요셉, 다윗, 바울 등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깨끗함으로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라
21절 말씀에서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항상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깨끗이 준비하는 그릇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자신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달란트를 받았든지 최선을 다해 감당할 때 주님께서 더 큰 일을 맡겨주십니다.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사람이 더 큰 일에 예비된 그릇입니다. 우리는 작은 임무에도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직장, 사회, 국가에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방법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악을 끊어버리고 믿음으로 준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모든 말다툼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고 하나님께 귀하고 높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진리의 말씀이 아닌 말다툼과 망령되고 헛된 말에서벗어나게 하옵소서.
오로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귀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을 훈련하게 하시고최선을 다해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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